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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할 일본의 역사 아비 빌린 사나이’

臥龍 李秉喆불잉걸眞劍 2008. 8. 21. 20:09
日本で得た息子でムスェット回って役目代行 ‘父借りた男’
(일본에서 얻은 아들로 무쇠터 돌며 역할 대행 ‘아비 빌린 사나이’ )
서기 660년(제명여왕 6년) 정월 대목의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사신 ‘을상(乙相) 가수몬(賀取文)’ 일행
100여명이 일본 규슈 쓰쿠시(九州 筑紫)에 와 있다고 전한다.
사람은 물론 말까지 철갑으로 무장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기마인물형토기. 높이 23.2㎝·폭 14.7㎝로
5세기 무렵에 제작된 가야 시대의 토기. 가야의 철갑 제조기술은 주로 고구려에서 전해졌다.
국보 제275호로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쓰쿠시는 한반도를 향한 북단 항구였다. ‘을상 가수몬’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가리키는 일본식 표기 중 하나다.
‘을’ ‘어울(於乙)’은 연못, 즉 연(淵)을 가리키는 고구려 말이요, ‘가수몬’은 ‘개소문’을 가리키는 일본식 발음이다.

660년 7월은 백제가 멸망한 달이다. 그해 정월에 연개소문은 왜 일본에 가 있었던 것일까.
쓰쿠시는 당시 일본의 전진기지였다. 백제를 돕기 위해 제명여왕(齊明女王) 이하 조정대신과
장군·병사들이 두루 포진해 있던 곳이다.

연개소문이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해 5월 개소문 일행이 나니와(難波·현재 오사카)에 도착해 2개월 뒤 귀국했다는 사실이
<일본서기>에 기술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백제의 멸망을 확인하고
.일본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정세를 파악한 후 고구려로 돌아갔는가.
제명여왕은 그해 7월 쓰쿠시에서 숨을 거둔다.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멸망한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백제에 병력을 보내
나당연합군과 싸우고자 했던 아들 교기(翹岐·훗날의 덴지천황)와 달리 제명여왕은 전쟁반대론자였다.
그녀는 백제부흥운동이 일본까지 망하게 할 것이라고 만류했다.
따라서 백제부흥론자들에 의해 암살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어떻든 제명여왕이 죽은 후, 아들 교기는 백제 왕자 여풍장(餘豊璋)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구원군을
백제로 보내 항전했으나 끝내 패하고 만다. 663년 9월 7일의 일이다.
혈연관계로 지방 토후들 장악 연개소문은 이처럼 <일본서기>에 적잖이 등장한다.

특히 660~662년에 당나라와 고구려의 치열한 전투 상황으로 볼 때
연개소문의 일본 나들이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잦고 체류기간도 길다.
평양에서 대동강을 타고 서해로 나와,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항로도 그리 수월하지 않다.
더군다나 일본에 자주 왕래하자면, 일본 지방 곳곳에 상당한 규모의 숙소도 확보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 문제를 거뜬히 해결했다. 각 지방 토후의 딸들과 인연을 맺어
아들·딸을 낳게 함으로써 가족관계를 넓혀 나간 것이다.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의 ‘사돈 늘리기’ 묘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찌감치 일본에서 얻은 아들 중에 ‘아베노히라부(阿倍比羅夫·あべのひらぶ)’가 있었다.

‘아베’란 아비, 즉 아버지를 뜻하는 우리 옛말이다. ‘히라’는 ‘비라’ 즉 ‘빌린’이란 뜻의 일본어화된 우리말.
부(夫)는 ‘사나이’를 가리키는 한어(漢語)다.
즉 ‘아베노히라부’란 ‘아베 빌린 사나이’를 뜻하는 묘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과 모습이 흡사했던
그 아들이 연개소문처럼 변장하여 그의 역할을 대행했던 것은 아닌지. 연개소문처럼 변장하기는 쉬웠다.

오글오글한 용의 수염처럼 붉은 구레나룻을 턱에 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다섯 개의 칼을 허리에 차고,
말을 탈 땐 엎드린 신하를 밟고 방자하게 올라서면 되는 것이다. 아스카~관동지방 손에 넣어

아베노히라부는
일본 속의 북방 이민족인 에미시(蝦夷·えみし) 토벌에 자주 출정했는데,
에미시는 아베를 먼 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벌벌 떨며 곧장 항복하곤 했다.

아베노히라부는 영락없이 연개소문 같았고
, 에미시 사이에 연개소문은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672년 임신(壬申)의 난(亂)을 일으키기 전에
일본 전국의 무쇠터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의 수도인 중부지방 아스카(明日香)에서 멀리 떨어진
동국(東國·현재 관동지방)까지 두루 손에 넣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동원된 것이 아베노히라부였다.

히라부는 연개소문처럼 변장하여 동국의 무쇠터를 돌며 쿠데타 동참을 강권하고 다녔다.
그때 권유의 결과를 아비 덴무에게 전달한 메모가 노래 형식으로 지금껏 남아 있는‘동국가(東國歌)’다.
4516수나 전해져 온
일본 고대 가요 <만엽집(萬葉集)> 중의 일부분이다.
‘아즈마우타(東歌·あづまうた)’라 일컬어지는
이 노래는 대부분이 연가(戀歌)요, 그 중에는 아주 진한 성애가도 적지 않다.
극비의 보고 문건이었기 때문에 발각될 경우를 염려해
야한 노래처럼 꾸며 이중 보고문을 작성한 것이다.

덴무천황의 아들로 기록 아베노히라부는
덴무천황(天武天皇)의 아들 명단에 시기노미코(しきのみこ)로 등재되어 있다.
‘시기’란 ‘무쇠 성’의 뜻이다. ‘시’는 ‘무쇠’, ‘기’는 ‘성’이라는 뜻의
고대 한국어다.

그가 일찍이 무쇠 고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쿠데타에 동참하기를 권유한 공로로
그 같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일까.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인지 그는 중용된 흔적이 없고,
말년을 어떻게 마감했는지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꼭두각시는 끝내 꼭두각시일 수밖에 없었는가.
아베노히라부, 즉 시기노미코는 북방민족 에미시뿐 아니라
요즘의 중국 북동부에 살고 있던 부족 숙신(肅愼)과도 여러 차례 싸워 이겼다.
‘아베 빌린 사나이’는 아베만큼 강한 명장이었던 것이다. 그의 훗날 삶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