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박정희대통령을 정신적인 기둥으로 생각하며그분을 정말 존경합니다
여러 정보, 잡학지식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더불어 생각하고 싶습니다
] 가까이서 본 인간 박정희 [7 ] | |||||
할머니 아무것도 안드셨다… (11편)
조국 통일과 민족 중흥의 제단에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 어느 시대나 그 시대상황에 맞는 상징어가 있게 마련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시대가 「개혁과 과거청산」으로 집약된다면,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화두는 뭐래도 「중화학공업입국과 안보」였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국가 목표는 중화학 공업 육성과 석유위기 극복, 새마을 운동과 중동 진출, 자주국방이었다. 한 손엔 망치를 들고, 한손엔 총을 들고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세계사의 한 복판으로 뛰쳐나간 한국인들의 70년대. 그 질풍노도의 서막은 1979년 10월26일 궁정동의 총소리로 역사 속에 파묻혔다. 지금까지 두고두고 민주주의의 장례식이었다고 비판받는 1972년의「10·17 특별선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열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면서 『대통령으로서 부여된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정상적 방법이 아닌 비상조치로써 남북대화 전개와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 실정에 가장 알맞는 체제 개혁을 단행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나섰다. 체제 개혁의 핵심은 다음 네 가지로 집약된다.
『1.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2.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 국무 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 국무 회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 회의가 수행한다. 3. 비상 국무 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4.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 질서를 정상화시킨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 해산과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 정지 등 초강경수단을 동원해 가면서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는 국민에게 이렇게 경고 했다. 『우리는 자유 민주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능력이 없을 때에는 민주체제처럼 취약한 체제도 없다고….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 둔다…』
지금와서 되새김질해 보면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발언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결단을 민족의 유구한 장래와 연관시켜 냉엄하게 비판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특별선언의 말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국민 여러분 나는 이번 비상조치의 불가피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오늘의 성급한 시비나 비방보다는 오히려 민족의 유구한 장래를 염두에 두고 내일의 냉엄한 비판을 바라는 바입니다. 나 개인은 조국 통일과 민족 중흥의 제단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지 오래입니다…』 유신선포와 거듭된 긴급조치로 인해 사회는 경직되었고 민주주의는 시들어 갔다. 그러나 조국 근대화와 자주국방이라는 70년대의 벅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박정희는 인권과 삼권 분립, 부의 공정한 분배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상당 부분을 희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철권의 통치자 박정희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자신의 암살자와 맞선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천지를 뒤흔든 문세광의 저격 장면은 이렇게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다. 박대통령의 연설은 정확히 10시10분20초에 시작 됐다. 다음은 연설이 시작된 지 15분 정도가 지난 10시 25분 24초의 정황이다.
74년 광복절 기념식장의 비극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이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둔탁한 첫 번째 총성. 이 총성은 문세광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다가 오발하여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쏜 소리였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 동안 시종…』
(와아 하는 함성) 『땅, 땅, 땅땅』(총성과 사람들의 함성이 뒤섞인다. 이 총성은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해 발사한 것인데 제2탄은 박대통령을 가리고 있던 방탄 연설대 좌측 상단에 맞았고, 3탄은 불발, 제4탄은 육영수 여사의 오른쪽 머리를 명중시켜 목숨을 앗아 갔다) 경호원 : 『가만히 계세요. 그냥계세요. 가만히 계세요』박정희 : 『무엇 때문에 그냥 뒀어』 경호원 : 『잡았나?』경호원 : 『예, 잡았습니다.』경호원 : 『사모님은』 『땅』(마지막의 이 총성은 경호원이 발사한 것으로, 광복절 노래를 부르기 위해 합창단으로 참석했던 성동여실고 장봉화양의 생명을 앗아갔다)경호원 : 『사모님은』박정희 : 『병원에 옯겨. 빨리. 병원에 빨리 병원에』경호원 : 『가만 있어봐』박정희 : 『빨리 병원에 빨리 옮겨』경호원 : 『또 딴 사람』사회자 : 『일반 시민들은 앉아주세요』경호원 : 『뒤로 좀 모셔야 되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 소리가 한동안 계속된다. 연단 아래로 엎드렸던 박대통령이 일어서자 관객들이 환호하는 소리였다. 10시26분, 약 10여 초 간 말없이 연설문을 바라보던 박대통령은 중단했던 기념사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 연설을 이어갔다. 그 순간 단상에 앉아 있던 정일권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김정렴 비서실장 등은 애간장이 녹았다고 한다. 통상 암살의 경우 1선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2선, 3선을 준비하게 마련이다. 언제 어디서 또 다시 암살자들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연설을 이어간 것이다. (이석제 당시 감사원장의 증언).
<박정희 : 『여러분들 하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원하는 평화통일의 기본 원칙을 명백히 천명하고자 합니다.
평화통일을위한 우리의 기본 원칙은 첫째는 우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은 상호 불가침 협정을 체결해야 합니다.
둘째는 남북은 상호 문호를 개방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남북대화를 성실히 진행시켜야 하며,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이 먼저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연설이 끝난 것은 오전, 10시33분.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박대통령은 아래 떨어진 육여사의 핸드백과 고무신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자 서울시장이 이것을 주워 경호원에게 전해주었다. 아내 잃은 허전함… 박정희는 강인한 내면을 가진 인간이었다. 패기만만했던 일본 육사 시절부터 사선을 넘나들었던 남로당 관련사건, 6·25의 숱한 전쟁터, 국가의 운명을 건 5·16의 대도박…. 시대의 태풍을 맨 몸으로 맞으며 그는 역사의 숲을 헤쳐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철권의 권력자라도 60대로 접어드는 문턱에서 아내를 잃음으로써 내면에 커다란 금이 가기 시작했다. 8·15 광복절 단상에서 남편 대신 목숨을 잃은 육영수 여사의 서거 장면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전 국민의 안방에 생중계됐다. 그만큼 국민의 마음 깊숙한 곳에 육영수라는 한 인간의 드라마틱한 영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박정희는 외면으로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내면으로는 조금씩 기울어 가며 인생의 황혼기에 느끼는 허탈감을 체험해야만 했다. 청와대 본관의 1층 집무실에서 격무에 시달리다 2층으로 퇴근하면 썰렁한 빈 방에서 긴긴 밤을 홀로 뒤척여야 하는 홀아비 시절, 박정희는 아내를 잃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 버리려 다짐했건만 잊어 버리려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1974년 9월4일)
아내를 잃은 지 2년이 지난 1976년 청와대에서는 큰 영애 박근혜씨의 생일 축하 파티가 열렸다. 대통령이 엄마 잃은 큰 딸의 생일을 위해 잔치상을 차린 것이다. 대통령과 근헤, 근영, 지만씨 등 네 피붙이만 모인 조촐한 생일 파티는 박대통령에 의해 녹음되었다. 월간조선이 부산의 정부기록보조소에서 찾아낸 이 녹음테이프는 어딘가 좀 쓸쓸하면서도 적막했던 청와대 생활의 단면을 전하는 듯 애잔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육영수의 빈 자리가 그 만큼 넓었다는 뜻이리라. 『가산 탕진하겠어요. 아버지』
<박정희 : 『빨리 와야지. 모두 동작이 그렇게 느려서』 근혜 : 『어머 저쪽에 지만이가 누가 보낸 거라고 가지고 왔는데』박정희 : 『가져와. 그게 뭐가. 케이크가? 케이크는 그 쪽에다 놔』 근혜 : 『아버지 너무 요란하게 하셨네』 박정희 : 『덕택에, 덕택에 아버지도 좀 얻어먹어야지』 (샴페인 터지는 소리) 박정희 : 『막아야지…. 지금부터 사진 찍어도 돼』근혜 : 『말도 제대로 못하겠네』박정희 : 『함부로 해 함부로. 지만이 거기 앉고. 근영이 왜 안와. 이야기 했어. 이야기 했는데 꾸물꾸물하고 앉았어』근혜 : 『테이블보가 이런 걸로 하니까 굉장히 화려해 보이죠』 박정희 : 『게 앉거라』 근혜 : 『이거를요, 옛날부터 있던 거예요. 어머니 계실 때부터 이 촛대가, 근데 언제 쓰나 하고 찬장에 두었거든요. 근데 오늘 문을 여니까 마침 보여서 이런 때나 쓰자 하고 네, 없는 거보다 훨씬 낫지. 니(근영)생일 때 또 가져다 쓰고, 아버지 생신 때도 가져다 쓰고』박정희 : 『찬장, 그 2층 식당 찬장 그 어디 두면 뭐 할 때 쓸수 있겠지. (근영씨를 향해서) 빨리 와 (근혜씨 쓸쓸한 웃음) 동작이 이래 느려서. 사진 찍고 녹음하고 있는데』근혜 : 『아버지, 너무 거창하게 하셨어요』 박정희 : 『뭐 거창하게 해』 근혜 : 『아버지 생신 때도 이렇게 안 하시고서는 뭐』근영 : 『언니…』박정희 : 『자 샴페인 이쪽으로 받아. 자 근영이, 지만이 생일 때도 』(샴페인을 따른다)근혜 : 『가산 탕진하겠어요, 아버지. 이런 식으로 생일 하다가는』 박정희 : 자… 아버지한테 따라…. 자 근혜』 근혜 : 『이건 어떻게 된 거예요』 박정희 : 『그쪽 먼저 해야 되나? 그럼 그쪽 거 먼저 하자』 근혜 : 『아니 쪼그만 거 아버지가 이렇게 해오셨어 글쎄』 근영 : 『아 맛있겠다』근혜 : 『잔을』박정희 : 『자 축배 한 잔 들고. 하나 둘 셋 생일 축하해』 근영 : 『언니, 생일 축하해』근혜 : 『감사합니다. 고마워. 아버지 녹음하는 건 중단하죠. 제가 말을 못하겠어요. 주눅이 들어서』박정희 : 『그래야 사진을 찍지 뭐. 요거만 찍으면 몇 번 안나오대』근혜 : 『녹음』지만 : 『이스라엘 건데』박정희 : 『지금 녹음 같이 돌고 있는 거라고』 근혜 : 『글세, 그러니까 제가 말을 못하겠다고』근영 : 『괜찮어 어때』 박정희 : 『근혜야 동작 늦어서 마지막에 퉁퉁하고 오는 것까지도 다 들어갔어』 근혜 : 『세상에 어쩜. 아버지 이거 가만 있어, 밥 먹기 전에 하면 안되잖아』 박정희 : 『거기다 놓고 하나만』근혜 : 『아버지 이건 정말 너무하셨어요』 박정희 : 『비밀녹음했다. 비밀녹음』 근혜 : 『나중에 자기가 한 거 들어봐 얼마나 쑥스러운지』근영 : 『괜찮어』근혜 : 『아유 이거 공보부 사람이 다 들을 거 아녜요. 쑥스러워서』박정희 : 『어때 이제 그만 하지』근혜 : 『잘 넘어가지가 않아요』 박정희 : 『옆에 방에 포도주 좀 준비했더라구. 장군, 지금 준비하고 있나?』 장군 : 『예 준비하고 있습니다』박정희 : 『근혜야 잔 받아』근혜 : 『됐어요. 저는 많이 못먹어요』박정희 : 『저 사람들 줄라고 그래』근혜 :『됐어요. 더 이상 못먹어요』박정희 : 『장군』장군 : 『예』 박정희 : 『자네들 가져가서 한잔 씩들. 그리고 이런 거 이런 거 뭐 좀 취사장에서 가져오라고 해. 자 수고들 했네』근혜 : 『고마워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과년한 딸을 위해 생일상을 차려준 아버지의 가슴속엔 어떤 감정들이 교차했을까. 촉촉이 젖어드는 듯한 분위기의 이날 생일잔치는 나약해져가는 인간 박정희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 같은 애잔한 장면이다. 지금까지 우리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이 파안대소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인간 박정희는 과묵하고 근엄한 철권의 통치자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실은 부끄럼 잘 타는 사람이었고, 우스개도 곧잘 했다는 사실을 측근들의 증언으로써만 남아 있다. 월간조선이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박정희 대통령의 장모 이경령 여사 (육영수 여사의 어머니)의 생일날 마련됐던 청와대 가족모임의 녹음 테이프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박정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정부기록보존소측 기록에 의하면 이 가족모임은 75년 하반기에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이 가족모임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이경령 여사의 생일이 1896년 음력 12월11일로 기억했다. 양력으로 환산한다면 75년 1월 22일. 장소는 청와대 본관 1층 식당. 정면엔 육여사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조촐한 음식이 준비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익명을 요구한 가족모임 참석자의 증언. 『이날 모임은 74년 8월 15일 육여사가 비명에 간 지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열렸습니다. 졸지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사위인 박대통령이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딸 잃은 장모 위로 위해 노래자랑
홀아비가 된 사위가 팔순의 장모를 위로하기 위해 연 생일 축하연. 장모 이여사는 사랑하는 딸을 잃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보다 명랑한 표정을 지었고, 농담도 숱하게 했다고 한다. 이여사는 시종 즐거운 얼굴을 지었지만 마음 속에 담긴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내보이지 않기위해 무서운 절재력을 발휘했다. 참석인사는 박대통령과 그 가족인 근혜, 근영, 지만씨. 그리고 육여사여사의 오빠인 육인수 의원 내외와 그 딸인 육해화씨와 그의 남편 이석훈씨(현 일석산업 사장), 남자 형제 육동렬 ,육동건씨. 육영수 여사의 동생 육예수씨와 남편 조태호씨 (당시 MBC감사).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가족들이 참석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육영수 여사의 언니인 육인순씨는 홍정일씨와 결혼해 모두 3남5녀를 두었다. 홍세표씨(현 한미은행장)와 그의 부인 김영자씨. 홍은표씨(현 수원대 생활과학대학장)와 그의 남편 장덕진 현 대륙연구소 회장. 홍정자씨와 그의 남편 유연상씨(전 영남대 이사장). 홍지자씨와 그의 남편 정영삼 현 민속촌회장.홍정자씨와 그의 남편 윤석민 전 서주우유 회장. 그리고 홍국표씨 (현 어린이 교통안전협회 사무총장)와 홍민표씨 (현 현대자동차서비스 이사)등이었다. 이날 가족모임은 장모인 이여사의 생일이었던 만큼 처가쪽 사람들을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날 가족모임이 누구의 제안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녹음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 테이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파안대소하는 소리, 간간이 정치적 의미가 섞인 농담, 일가친족들의 개성이 섞인 노래자랑…. 그 말미엔 가족 모두가 존경하던 육여사를 잃은 가족들의 애잔한 분위기로 인해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그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한다. <계속>
글쓴이 : 김두영(전 청와대 비서관) 혜울 자문위원장 김두영
|
|||||
'나의 지식 > 박정희대통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박정희 대통령 (0) | 2017.07.10 |
---|---|
우리민족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 이력서 (0) | 2017.01.06 |
박정희 대통령 위패와 나의 생각하는 삶 (0) | 2013.05.10 |
가까이에서 본 대통령 인간 박정희 (0) | 2012.09.26 |
위대하신 영웅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을 알자 (0) | 2012.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