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식/세계여행지와 맛집

나고야 名古屋 내 어머니 고향

臥龍 李秉喆불잉걸眞劍 2010. 6. 28. 00:37

 

愛知県名古屋市

 

나고야는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아이치현의 현청 소재지이고,  혼슈 남부 해안 산업의 교통 중심지이며,

인구가 2백만이 넘는 산업 도시이다.       경공업뿐 아니라 자동차, 조선, 기계 등 중화학 공업도 발달하였다.

역사적으로 나고야는  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이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생지이다.

 나고야 시내의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반듯하므로, 길을 잃거나 헤맬 염려는 적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큰 산업인  칭코가 생겨난 곳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며

사람들을 몰두하게 만드는  핀볼게임의 번쩍거리는 빛과  큰 소리가 이 도시의 특징이 되었다.

일본은 홋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큐슈九州 4개의 섬과  그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동서 제도 및 혼슈 중부에서

남쪽의 태평양으로 이어져 내리는 伊豆, 小笠原 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나고야는 혼슈의 한가운데 위치, 동서 교통의 기점으로 아이치현의 수도이고 인구는 2004년 6월 1일 기준으로 220만 90명이다.

나고야는 연중 온화하며 큐슈나 시코쿠보다 강우량이 적다. 계절적인 특색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3~5월이 봄 6~9월이 여름, 10~12월이 가을, 1~2월이 겨울이다. 그리고, 9월경에 태풍이 불어오며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는 장마 기간이다.

도요타 자동차, 중부전력, 동방가스, 노리타케, 名鐵 5사가 이 지역을 대표하는 5대 기업으로 東海, 중부 지구의 경제계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기업 풍토로서 종래 실리 중심의 가치관이 뿌리깊게 정착되어 있어 배타 적이고 보수적 성향이 강한 면을 지니고 있다.

 

나고야는 역사적으로 오다 노부나가(1634~15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6~1598)의 탄생지이며,

그들의 통치 아래 일본의 전 국토를 통일하였다. 1945년 공습으로 나고야시는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나고야의 옛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전후의 복구 작업 이후 도시는 넓고 세련된 현대식 도시가 되었다.

 파칭코는 나고야에서 시작되었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오락이 되어 있다. 관광도시로서 나고야는 경치나 역사적인 매력이 가득하다.

 나고야는 나고야 철도(메이테츠)에 의해 운영되는 뛰어난 私鐵을 구비하고 있어 모든 관광지를 잘 이어주고 있다.

2005년부터 常滑沖에 세계 항공 네트워크의 거점으로서 일익을 담당할 중부 신국제공항을 건설 했다.

나고야에서 태어나 사셨던 나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1940년대 나고야는 일본 최고의 화학공업지대였다고 한다

나의 위대하신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1934년 4月16日 日本 愛知県名古屋市中區丸田町十八番地에서 태어나셨다

나의 위대하신 어머니 ♡  “月城照子(つきしろてるこ)김을희 세례명 : 글라라”姓名은 月城照子 한국성명은 김을희 (金乙歖)다

私のお母さんは 愛知県名古屋市松元国民学校に通われた 名古屋市松元國民學敎4学年3班だったといわれて 4學年3반에在學하셨고

外祖父は名古屋で韓国商人たちの代表として(せんとう:공중 목욕탕)と大商店を経営した 大金持ちであった

외할아버지께선 한국상인 대표로 공중목욕탕과 큰상점을 운영하셨던 한 큰부자이셨다

私のお母さん故郷だお母さん月城照者 韓国金乙歖) 家の 住所は名古屋市中丸町16番地だ 必ず行って見たい..

 

외할아버지께서는 나고야의 한국인 대표이셨는데 목욕탕등을 경영하셨던 부자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식구들과 귀국하셔서 경남 고성군 개천면 청광리23번지에 정착을 하셨고 결혼하시기전까지 사셨지요

어머니께선 청광국민학교에 다니셨다 그때 외할아버지께서 청광국민학교에 학교종을 기증하셨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께선 소녀시절부터

총명함과 다재다능한 손재주에 가족들은 물론 이웃동네에도 소문이 자자한 천재 이셨다 한국에 와서 고무신을 처음 보셨고 뛰어난 눈썰미와

 

손재주로 동네사람들의 칭찬과 사랑을 남달리 받으시며 소녀시절을 보내셨는데 어린시절 일본 나고야의 도회지생활에 익숙하셨던

당신은 ♡처녀시절에는 도시생활을 원했기 때문에 고성군 일대의 부자들인 양반집에서 청혼이 들어와도 피해 다셨다는 이야기는

마산 계희이모께서 생생한 기억을 통해 말씀하신다 어느날 호리호리한 키에 미군 카츄사로 곤복무중이던 남자와 맞선을 보고

이 사람은 배운게 많아서 결혼을 하면 부산이나 도시로 갈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에 중매결혼을 하셨고 1956년 12월30일 혼인신고를 하셨는데

 

나의 기억에서도 어머니께선 여장부였다 말 보다는 실천을 하는 행동으로 살아오셨고 늘 슬기로움과 번뜩이는 지혜로 어려운 살림을

잘 꾸려나오셨다   ♡어머니 께선 천주교신자가 되셨고 부산초장성당에서 지학수 다니엘 주교님께  

1962년 4월19일 세례를 받으셨고 그때 3살이던 나도 어머니와 같이 받았다 어머니께선 2004년 12월6일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세례명은 글라라이며 평생 주님과 마리아님을 공경하고 따르며   제가 어릴때 기억도 납니다  가난을 극복하기위해   집안일을 앞장서서

개척하시며 생선장사 과일장사 파출부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셨고 잠시 쉴틈도 없으셨는데

   이렇듯이 평생고생만 밥먹듯 하시다가 연약한 몸에 쌓여진 고통 때문에 2004년12월 6일에 천당에 가셨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활동적이시던 어머니 평소에 식사도 대충 먹는둥 마는둥 식구들 식사 끝나면 상을 치우고 서신채로 남은 반찬들을 모아서

비벼서 드시던 모습을 보며 성장했고 언제나 말보다는 실천이라는 행동으로 보여주시던 어머니의 가르침을 배웠고

제가 어릴때 워낙 집안 형편이 어려운 탓에  연탄배달등도 했지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고등학교때는 통신과를 선택해서

장학생이었고 대학에서는 전자공학과를 전공해서 통신 전자관련 자격증은 다 취득했었지요 그때마다 기뻐해주시던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복무할 때 면회 오셔서 니는 군대생활 잘할거니까 걱정 안한다고 하셨고 그후에도 항상 저를 확실하게 믿어주셨던

어머니의 저에 대한 신뢰와 사랑 때문에 제가 사회생활하면서 소속되었던 모든 조직속에서 항상 상위그룹의 중간 정도에는 속했습니다

 

가족들중에서 유일하게 어머니의 모습과 생각과 행동방식을 많이 닮은 저는 어머니처럼 암기력이 뛰어나 어려운 전자 전기공학과 수학과목도

암기과목처럼 생각하며 공부를했습니다 지금 마산에 살고계시는 어머니 여동생 저에게는 이모께서는 

 "진해에 있던 통제사령부에서 고"박정희 대통령각하와 육영수여사님을 이모가 모셨던 이야기와  일본에서 사실때 이야기를 자주하십니다

 특히 어머니의 어릴적 이야기   처녀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언니는 일본에서 학교 다니던 어릴때 부터 예뻤고 머리가 좋은  천재였는데

  무슨 고생만 그렇게 하다가 70살에 세상을 떠나다니 하면서 애통해하십니다 

 

어머니 여형제들은 천재적 두뇌와 남자들을 능가하는 여장부 였습니다 어머니 당신께선 보통가정처럼 오손도손 사는게 꿈이셨는데

집에 안좋은일이 자꾸 생겼고  어머니 당신께선 가톨릭신자로 마리아님을 의지하면서 과일장사등 돈버는 일은 뭐던지 하셨고   

음식 가져와서 주시던것 먹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1년 매출액이 1조100억원 수준의 지금의 포스코ICT에 입사하여 1986년부터 광양제철소에서

근무하면서 떨어져 살았는데 그 핑계로 어머니를 자주 뵙지도 않았고 어머니 고생을 알면서도 도와드리지 않았던 죄인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총명하신 머리를 닮아 일본히타치 설비의 PLC(자동제어 컴퓨터)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전문으로 광양제철소1냉연 AGC REC

ASC제어 컴퓨터를  전담 했고 자타가 인정하던 기술자가 되었던것은 잘아시죠 그러나 97년 고속도로휴게소 화징실에서 뒤로 넘어져

뇌진탕 사고를 당해 울산동강병원에서 1차 뇌수술을 받은후 식물인간이 되었지요 고열로 인해서 담당의사도 난감해 했었는데

관장약을 구입하셔서 신부님께 축성을 받아서 제가 입원하고 있던 울산동강병원중환자실에 간호하러 부산에서오실때마다 항상 가지고 다니시며

의사와 간호사의 눈치를 보다가 중환자실 간호사 몰래 관장약을 사용했는데 엄청난 양의 변을 본후에 열이 내렸고 제가 의식을 찾았다고

 

 어머니 일기장에 적혀있습니다

1997년 3월23일 어머니일기장에는 발음대로 글을 쓰신 글 그대로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너무나 귀가 막혀 말이 안나온다 사고후 10일 지나고

11일이다 병을 보지못혜 한번씩 얼굴에 열이 오로고 오른손으로 배을 만지고 가슴을만지고 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11일체 병을 못바

얼마나 답답할까 아무레도 열이 오로고네리고 한것은 병을 못바 그런것 같다 병을 보면 시원할것같다 부산에서 강장약을 사가지고 호주머니에 넣고

다닛다 강장을 시키면 파아-하면서 병이 나오면 머리에 지장이 있을카바 몇칠동안 만설렸다. 오늘은 성모님께 도와달라고 하고

호소하더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면회시간에 일치 더러가서 강장을 시켰다 어떻캐 혼자서 강장을 시킬까 고민했는데 고마께도

 

 언등이를 더러주어서 쉬께 강장을 할수있어다 강장시킨후 조금 있다가 소리도 없이 얼마나 병이 나오는지 감단할수없어다 새깔이 검파르고

 피가 석여 불근새도난다. 소리도 없이 키우키우 나온는데 강차 놀렜다 그리고는 쉬운한지 잠을 솔솔잔다 하느님 감사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 이럭케 마음이 개원하긴 처음니다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슬기로운 지혜로 의식을 찾았고

그때 저를 간호중이시던 어머니께 처음 드렸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머니 일기장 한권 사주십시오”라고 했지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일기를 쓰게 되어 지금 33년째 일기를 쓰고있는데 그 당시에 의식은 회복했으나 제가 왜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지 몰랐고 어눌한 발음으로

몇마디씩 말을 하게 되었는데 기억을 찾기 위해서 일기를 쓰면서 생각하고 싶어서 였던것 같습니다

97년 부터 저의 뒷바라지를 헌신적으로 해주시면서 저를 사랑해주신 어머니 정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겁니다

"{어머니와 화순하와이 온천에서1박을 하고 부산으로 귀가도중 11년 근무했던 전남광양제철소에 들러 광영성당 성모상앞에서 2004년 2월 "}

어머니와 같이 촬영한 마지막 사진이 될줄 몰랐습니다 어머니 보고싶습니다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김치찌개와

어묵 볶음 어묵 국 김치를 먹고싶습니다 

키가 작으셨지만 어머니께서는  하늘나라에 가시기전까지 컴퓨터도 잘하셨고 가족들 주민등록번호와 저축통장번호는 물론 친가 외가의

고조부님까지의 기일도 평소에 외우고 계셨고 제가 차를 두고 몇일 타 지방에 가면 어머니께서 시동을 걸어 차를 주차구역에서 관리도 해주시는등..

동네사람들이 놀라워했고 어머니를 천재라고 했지요  어머니 얼굴을 닮아 준수하게 생긴편이며 어머니께서 주신 제 몸은 마른체격이지만 근육질이고

 

 183cm의 키에 체력도 좋았지요   저도 중년기 후반의 인생을 어머님이 안계셔서 살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물건은 왼손을 사용하며 왼발잡이인 저는 30대 시절 회사 동호회의 산악회를 조직해서 전국의 산을 다녔고 축구 배구를 잘하는 편이었으며

특히 족구는 왼발 발목을 이용한 좌우측 꺾어 차기와 버헤드킥을 자유자재로 하던 어머니께 축복받은 몸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천당 가시기전에 알고 계시던 그대로 입니다만 건강합니다.

저도 어머니를 쏙 빼닮은 공통점이 많아서 활동적이라 한국자원봉사연합회 소속 부산일어 봉사회 회원으로 사회활동을 하며

2002년아시안게임때 본부에서 일본어 번역,통역자원봉사도 할수 있었던것은 전부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전까지 저에게 격려와

헌신적인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힘이 생겨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2004년 12월6일에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의식없이 병원에 누워 계실때

어머니께 입맞춤하고 어릴때 만지던 젖을 빨아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안보여 주셨지요 그때 제가 40대 중반이던 불혹의 나이였지만

어머니께는 아이에 불과한데 어머니께선 제게 화가 나셔서 가만히 계셨던겁니까

어머니께선 저를 영리하고 착실한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일기장에 적어놓으셨는데

지금쯤 불효한 이놈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계실겁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모든 자신을 잃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지금에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천당에계신 어머니께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보답하는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어머니께서 남기신 일기장엔 일본나고야 고향집 주소와 다니셨던 학교 愛知県名古屋市中區 丸町十六番地 松元國民學敎4學年3班 ,

 어릴때 성함은 月城照子 (つきしろてるこ)라고 적혀 있습니다 제가 어머니 고향 나고야에 같이 여행가자고 말씀드린적은 있지요

여행비도 제게 있었는데 어머니께 적극적으로 가자고 말씀 안드린 것이 제 평생의 한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무관심했더라도

어머니께서 일본고향집에 가자고 한말씀만 하셨더라면 어머니 원하시는 날짜에 계획을 세워 어머니 모시고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먼저 말씀드려야 했습니다만 어머니 그토록 생각하셨으면서 제게 말씀 안하셨습니까 잘못했습니다

 제가 빠른시간내로 일본나고야의 고향집 주소지에 어머니 사진을 품에 안고 꼭 가겠습니다

  오늘밤 그리고 제가 죽을때까지 밤마다 어머니를 꿈에서라도 뵐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죽을때까지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께서 평생해 오셨던 생각과 행동들을 잊지않고 꼭 기억해서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면서 어머니께서 생전에 훌륭한 아들이라고 생각하셨던 기대에 어긋남이 없는 떳떳한 아들이 되려 노력하고

틀림없이 자랑스런 큰아들이 되겠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종교와도 같았던 당신은 つきしろてるこ 김을희 글라라 저의 위대하신 어머니 입니다

 

영원한 저의 연인 저의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 할수 있겠습니까 제게 어머니의 그 슬기로움, 지혜를 주시고

저의인생길을 인도해주소서 지난 세월 어머니 저는 불효막심한 놈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으며,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음은 잘아시지요. 제 가슴속에 언제나 자리하셨던 어머니의 흔적이 뻥 뚫려버려서 너무 너무 허전하고 춥습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말씀 따스한 눈빛 어머니의 따뜻한 미소 어머니의 따뜻한 모습이 더 생각납니다,

  저는 어머니의 큰아들로 태어나 살아 왔고

    1997년에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어머니 덕분에 다시 살게 되었으므로 어머니께 2번 태어나 2번 살고 있습니다

    제가 구십구만천구백구십여덟번 더 태어나더라도 꼭 어머니의 큰아들로 백만번 태어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어머니께서 지금 제곁에 안계시기에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제 잘못을 속죄하며 진심으로 제 목숨을 바쳐 어머니를 편히 모셔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백만번 어머니의 큰아들로 태어나겠습니다

生前에 받은 헌신적 사랑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보답이라도 하며 

앞으로 남은      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여덟번 다시 태어날때마다 제가 못다한 효도를 하겠습니다

절대로 실망안하실겁니다 지금은 어머니께서 하늘나라 천당에서 편히 계시도록 매일 아침 저녁 기도를 드립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이곳은 2010년 06월28일새벽 1시 23분이네요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시던 김치찌개를 못먹어 본지 오늘로써 2029일째됩니다

 

어머니 드릴 말씀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버리고 다른 세상 당신만의 곳으로 떠나버리신... 어머니 밉습니다  너무나도 밉습니다

어머니께서 지금 계시는 그곳이 그리도 편하시나이까

제가 있는 이곳에서 어머니가 떠나 가버리시고 홀로 이 자리에 남은 저는 어머니가 밉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밉고 미워서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위대하신 나의 어머니! 저에게 뜨거운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으나 느끼지 못했고

 

헌신적인 베품을 주셨지만 잘알지 못한 죄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으나 어머니 은혜를 잊지 않고

어머니의 인자하신 얼굴을 가슴에 새겨서 꺼내어 보면서 어머니가 바라시는대로 성당에도 잘 다니면서 진실하고 착하게

어머니가 주신 축복받은 몸과 정신을 소중하게, 강하게 다듬으며 건강하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저에게 헤아릴수 없는

희생과 헌신적인 뜨거운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던 어머니가 너무 밉고 야속해서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머니께서 웃으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있다면 내가학창시절 각종자격증을 다 취득했을때와 강원도 인제원통 12사단사령부에서 군복무할때 면회 오셔서 활짝 웃으시던 모습

2004년 나내차를 타고  광양 순천등으로 다녔을때 전남 화순온천에서 1박을 하고

아침에 식사하시면서 음~ 전라도 음식정말 "맛있네"라고 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시던 모습과

내가 97년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에서 의식을 회복한 후 기뻐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평소에  웃으실 여유도 없이 고난과 맞서 싸우시던 나의 위대하신 어머니다 나는 퇴원후에 어머니사랑합니다 라고

어머니께서 살아생전에 난 딱한번 했었다 용서하십시오 나의 위대하신

어머니  나의 엄마...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제 꿈에 항상 오시고 좋은 말씀해 주십시오♡♡♡

어머니와 일본어로 이야기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께서 어릴때부터 잘알고 계시는

일본어로 제가 지금 드리고 싶은 말씀 드립니다 ぼくのお母さん月城照子(つきしろてるこ)

あいたい なつかしいんですね 私のお母さん月城照子 金乙歖愛してます ゆるして下さい 愛してます

こぃしい,あいたい なつかしいんでね 私ね一生懸命に 頑張ります

ぼくのお母さん月城照子つきしろてるこ(金乙歖)の長男ぼくしんけんな李秉喆

私のお母さん月城照子 金乙歖愛してます 私ね一生懸命に 頑張ります頑張ります

ぼく 李秉喆の永遠な戀人 お母さん眞面目な月城照子の夢を每日見ながら

ぼくのお母さん月城照子愛してますぼくの お母さん 月城照子の永遠な長男李秉喆

 

 

            

"어머니댁  앞의  복숭아 나무  2010년 3월촬영"   어머니께서 2004년 12월06일 하늘나라에 가시기전

3월경에 복숭아 꽃 도화를 같이 보면서 이야기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죠   복숭아 나무는 꽃이 먼저피고

꽃이 지면 잎이 나는데 연분홍빛이 너무 아름답고 좋다고 하셨지요 예  저도 도화를 좋아합니다 벚꽃보다 더아름답습니다 

 

        お母さん思い出しますかお母さんお宅の前の桃花を一緒に見ながら話をしたんですね花が先に咲いてから

            落ちれば葉が生える桃花は桜色に本当に格好いいと, 私も桃花をすごく,非常に好きですね

             어머니 오늘로써 어머니 손을 못잡아본지 2029일째 됩니다 2010년 06월28일 새벽을지나 아침 05시 49분입니다

                        제가 빠른시간내로 일본나고야의 고향집 주소지에 어머니 사진을 품에 안고 꼭 가겠습니다

                           나의 위대하신 어머니 つきしろてるこ 김을희 글라라의 큰아들 李秉喆 베네딕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