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식/지식과 시사만평

우리는 박정희대통령을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친 위인으로 평가해야 한다."

臥龍 李秉喆불잉걸眞劍 2012. 10. 6. 04:35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의 긍정적인 평가 자료들을

수정리한 글이며 보기에 적당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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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의 긍정적인 평가 자료들을 수집하여 묶어

 이렇게 글로 올리게 된 계기는 최근에 빚어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문제를 두고
트위터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반발을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관심이 많고 연구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여러 전문서적들을 섭렵하면서 우리나라 현대사는 물론이고,

국사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위대한 지도자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보기 때문에

 

 일부 개인적인 성품을 물고 늘어지며, 독재자로 매도하고,
 심지어 그의 경제발전 업적조차 부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

 

그리고 자료가 없다고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별로 없다거나
 영향력이 있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주진우 기자가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해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검증이 되지 않은 이야기를 유포시켜 '루머'가
인터넷상에 퍼져있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 이렇게 올리게 되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각계 각층의 전문가들의 평가와 관련된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가 된 것이 별로 없는 것에 자극을 받아 이렇게 올리게 되었다.

 

본 글에서 인용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관련해서는
아주 정확한 출처를 통해 보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언급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음을 앞서 밝히는 바이며,

 

이를 통해 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연구가
온라인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부정적인 편견을 가진 자들이

 올바른 사고를 통해 올바른 길로 가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렇게 올린다.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일어난 변화는 우주적 척도로나 가늠해야 할 엄청난 것이다."

 

 - 1970년대 초 프랑스의 파리에서 발행되는 조간신문으로 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인 

<Le Figaro>의 막스 올리비에 논설위원이 <Le Figaro>에 실은 글의 내용 중

 

"박정희· 김정일 독재자, 박정희 나라경제 발전시킨 독재자,

 

김정일 사람들 굶겨 죽인 독재자"

- 평양 철도대학 담장에 북한 시민이 빨간 벽돌에 흰색 분필로 한 낙서

 "당신의 추앙 받는 아버지인 박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에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박 대통령에 대한 외교사절 및 외국인 사회의 애도가 큰 위로가 되길 바란다."

- 멜리 당시 주한 터키대사가 외교사절단을 대표해 박 전 대표에게 보낸 조전의 내용 중

 

"남한은 세계경제로 통합되었다.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1961∼1979)는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산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탈바꿈했다. 수도 서울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 독일 국정교과서 중학교용 지리교과서(헤센주) 109쪽

 

"해마다 독일 도로에서 남한 자동차가 늘어난다. 현대와 기아, 대우는 유명한 자동차 메이커다. 1968년에야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 이 나라는 현재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으로 성장했다."

- 독일 국정교과서인 고교 상급반 지리교과서(아시아·태평양지역) 96쪽

 

"콩고민주공화국, 에티오피아, 세네갈, 르완다, 우간다, 코트디부아르 등

아프리카 국가들의 공통점은

21세기 아프리카 국가 발전의 모델을

1960년대 박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방식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이다."

- 2010년 7월 6일 외교통상부 관계자의 말

 

"1960년대까지도 남한은 성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79달러로 가나나

수단과 같은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그 당시 세계은행 보고서는 버마와 필리핀의 앞날을 장밋빛으로 보았다.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에너지원이 없는 남한은 경제적 전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은 오늘날 세계 11대 무역국가이며 1996년부터 OECD 회원국이다.

불리한 자연 공간적 전제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경제기적을 이루어냈다."

- 독일 국정교과서인 고교 상급반 지리교과서(아시아·태평양지역) 92쪽

 

"새마을운동이 국내 젊은 세대들에게는 유신의 잔재로,

독재 시대의 국민동원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평가는 대조적이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수요는 베트남, 라오스,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 동남아시아권 개발도상국에서 광범위하게 포착되고 있다.


국내 농촌 새마을운동은 1980년대 들어 멈춘 상태로 외국인들의수요는 꾸준하지만

마땅히 보여줄만한 시범 마을도 없다. 21세기형 지역활성화모델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중국의 신농촌건설운동 등에 그 위상이 밀릴 우려도 있다.

 

이제는 새마을운동을 재평가하고
해외 수요에 대응해 새마을운동의 국제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정기환 선임연구위원이
2006년 4월 26일 쓴 '한국 농촌개발 경험의국제화 전략' 보고서의 내용

 

1999년 8월 23일자 <TIME지>

"박정희는 비록 독재적 성향을 가졌지만 한국의 최장수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경제적 약체 국가를 산업강국으로 변모시켰다."

- 미국의 <TIME>,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사해설지다.
이 주간지는 오랫동안 온건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반영해 왔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다소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 400여 명의 특파원이 활동하고 있다ㅣ 1999년 8월 23일자로

<TIME>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인물 20인」의 내용 중

<박정희를 반대했던 인물들의 평가(13인)>

김신조,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러 내려온 남파 공작원 출신

"지금에 와서 보니까 북한에서 박정희 대통령만 계속 죽이려고 했다.

왜냐하면 박정희를 살려두면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를 시키기 힘들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내가 40년을 살면서 대통령을 8번째 겪는데, 우리나라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든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물론, 문제점도 있지만
그의 업적은 인정을 해야 한다. 그의 과실보다 업적이 더 많기 때문에

 과실로 깎아내리려 하지 말아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철로를 만들었다.
우리가 그 철로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박정희를 남한에서 흠집을 내는 것은 옳지 못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 김신조, 박정희 정권 당시 박정희의 목을 따기 위해서 내려온

남파 공작원 출신으로 북조선 민족 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 게릴라 31명 중에 유일하게 생포되었고,


후에 대한민국에 귀순하여 서울침례회신학교에서 침례교 신학을 전공하고

서울성락교회 목사가 되었고 한나라당 북한 인권 및 탈북자·납북자 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다
2010년 6월 26일 mbn <박경철의 공감 60분>에서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내용 중

김문수, 경기도 지사 및 대통령 후보

"나도 젊을 때 거꾸로 생각을 많이 했다. 무슨 자동차를 하고, 고속도로를 하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히틀러처럼 국민을 현혹시키기 위한 것을 하고,

 독재정권의 속임수로 보고 저항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훌륭한 역사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종대왕 상만 광화문에 세울 것이 아니라
5,000년만에 최대 역사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 상도 세워야 한다.

" - 김문수, 서울대학교 경영학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1978년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85년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1970년대 노동 활동을 하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대학교에서 제적된 후, 좌파 사회주의 노동운동 조직이었던

 서울노동운동연합의 핵심 조직원으로 활동하고,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이던 1986년 구속되어 고문을 받고

 2년 6개월간 복역했고 이후 정계에 뛰어들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정감사 최우수의원 및 일 잘하는 국회의원,

 약속 잘 지키는 국회의원 1위를 휩쓴 후 경기도 지사를 지냈다ㅣ
2010년 2월 26일 경기도 수원시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열린

 ‘기우회’ 인사말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이해찬, 제36대 국무총리

"민주화 운동시에는 박 전대통령의 한쪽 측면만을 보고 비판을 했었다.

러나 지나고 나서 보니 박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의 공을 알게 됐다.
근대화와 민주화가 이렇게 짧은 시기에 압축적으로 된 나라가 없다.

 그래서 사고의 균형을 갖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나의 평가는 진심이다.

 

 이는 단순한 '립 서비스'가 아니다. 90년대 중반 넘어 의정활동을 하면서

국가를 넓은 시각으로 보다보니 박 전 대통령이 경제성장의 성공적 사례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 평가하게 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됐다"

 

 - 이해찬, 박정희 정권 때인 70~80년대 학생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민청학련 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당하기도 했다. 이후 광장서적,

돌베개출판사 대표 등 출판인으로도 활동했으며, 1987년 한겨레 신문의 창간 발기에 참여했다.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에 입당 이후 88년 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됐으며,
1988년 당시 5공 청문회를 주관한 청문회스타의 한사람이었고 13대 총선 이후 내리 5선을 지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서울특별시 부시장과 38대 교육부 장관을 거쳐 참여정부 출범 후

2004년 6월 30일부터 2006년 3월 15일까지 제36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교육부 장관 재직 시 교원비리 근절과
집중 단속과 무시험 대학입학 전형, 학급 정원 단축, 교원정년 단축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ㅣ2004년 7월 2일 2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만나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해 한 말의 내용과 7월 9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진심이었냐고 묻는 한나라당 김기현 의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내용 중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은 민주화의 정체와 인권 탄압 등 '과(過)'도 있었다.

하지만 근대화 달성, 가난으로부터의 탈피 등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박 대통령 시절 민주화 투쟁과 반체제 투쟁 등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이다. 그

러나 지금 그 시절의 어두운 면만 파헤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밝은 면, 본받아야 할 면을 살려 미래로 가야 한다.

이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 손학규,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및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운동 간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제14대 민자당 국회의원,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 대변인, 제15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

제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제31대 경기도 도지사,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통합민주당 공동대표,
민주당 상임고문과 제18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과거 반독재 투사였던 백봉

나용균선생 기념사업회 제2회 백봉신사상과 백봉 나용균선생 기념사업회 제3회 백봉신사상,


평등부부상과 한국을 빛낸 CEO 글로벌 경영 부문을 받았다.

그는 과거 고3 때도 국회의사당에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여했으며,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다니면서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끝나고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섯고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 정학을 받았으며,

무기 정학 중에 데모를 해서 또 무기 정학을 받았다.

 

 이후 그는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노동했고 나중에 학교로 돌아와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유신독재체제 당시 그를 잡으면 현상금 200만 원에 2계급 특진이 걸리는 등
반독재의 투사로 일컬어진다. 현재는 민주당 대표이자 제18대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있다 2005년 4월 1일 경기지사로 대구를 방문해서 했던 말과

 2006년 11월 박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뒤에 했던 말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민주개혁 정부의 업적들이 박정희 시대를 능가할 수 있었다면

과거의 향수로부터 벗어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입국을 과학기술강국의 시대로 이끌어내겠다.

 

박 전 대통령이 독재하고 억압했지만 미래 먹거리와 관련해 고민했던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 전 대통령 때 씨 뿌리고 가꾸었던 먹거리로 2만불 시대를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이 씨뿌리고 가꾼 것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황무지에 창원공단을 만들었고 자동차, 조선 산업을 일으켰다.

 

박 전 대통령의 국가경제에 대한 식견과 비전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 모두가 평가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인 출신으로서

당시 시대가 요구했던 분명한 목표와 방향성을 가진 성공한 지도자였다."

- 정동영, 서울대학교 국사학 학사 및 웨일즈대학교대학원 저널리즘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문화방송 보도국 정치부 기자, 미국 LA특파원을 시작으로 문화방송 통일부 차장,
제15대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과 당무위원,

6.4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대책본부 기획단 단장,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특별보좌역,

새천년민주당 창단준비위원회 청년위원장, 제16대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대변인과 최고위원과 상임고문, 한국인터넷정보학회 회장,

 

제16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제33차 다보스포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특사,

제31대 통일부 장관, 열린우리당 중앙위의장,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열린우리당 당의장, 민주당 상임고문, 민주당 공동 선거대책위원장,

 제18대 국회 국회의원, 민주당 상임고문,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

민주당 최고위원회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남북평화특별위원회 위원장과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있다 2006년 11월 11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과

2007년 11월 19일 항공기 부품을 생산하는
창원공단내 '수성기체'를 방문한 자리에서 했던 말

 

안병직,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산업화하는 국가는 어디서나 민주주의나 시장경제가 병행한다고 생각하면

 역사적 사실과는 어긋난다.

 

박정희는 단군 이래로 가장 번창한 나라를 만들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 조선후기는 너무나 가난한 국가다.

그런 국가를 이렇게 번창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박정희의 수출주도 공업화 정책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여 중진자본주의로 나간다는

캐치 업(catch up)이론에 입각해 보면 박정희의 경제개발이론은 탁월하다. 

과거 그를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봤지만 이젠 한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본다.

박정희식 군부 독재가 아니었다면 경제 발전은 어려웠을 것이다."

 

- 안병직,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전공분야는 한국경제사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교수,
동경대학 경제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소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후쿠이 현립대학 대학원 특임교수를 지냈던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다

2006년 6월 5일 문화일보화의 인터뷰 내용과 2008년 12월 1일 서울 보성고에서 행한
현대사 특강에서 학생들의 박정희 대통령 평가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내용 중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박 전 대통령 식의 경제 개발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유공자이며

경제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많다는 점과

한국처럼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이며  

민주화 진영이 (그간)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 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군사문화와 대대적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 시대의 발전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국민들로부터는 (민주화 등)

다른 욕구가 나온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적 성공이 그의 권력을 도리어 잠식했다."

 

- 백낙청, 브라운대학교 영문학 학사 및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와
동 대학원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 시민방송 이사장을 지냈으며,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교수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시민방송RTV 명예 이사장으로 있다. 그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 재직 중이던

 1974년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서명했다가
교수직에서 파면되는 등 박 정권과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2005년 5월 15일 동아일보와 가진 전화 인터뷰의 내용 중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명예교수이자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

"그의 근대화 성취는 높이 평가하지만 독재는 혐오한다.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의 영감은 일찍이 사회 모순과 가난을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과 교육에 있다.

 

박정희가 쿠데타 2년 후인 1963년 반만년 역사는 퇴화와 조잡과 침체의 연속사였다.

그의 어린 시절 분노가 씨앗이 되어 나라의 경제 발전이라는 긍정적 결과를 낳았다는 점은
21세기 한국에 행운이었다. 
 

이승만이 축적했던 지식과 국제적 감각,

박정희가 가졌던 기백과 추진력, 여기에 더해 온유하면서
카리스마를 한몸에 담은 리더가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완벽한 사람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 비전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 장단점을 잘 알고,
단점을 메워 줄 수 있는 훌륭한 보필자들을 이용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 이정식, UCLA 정치학 학사 및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교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조교수, 부교수, 교수와

연세대학교 영재 석좌교수를 지냈다. 


그는 박정희 치하에서 어용 학자가 되기 싫어 미국으로 이주를 했으며, 

<한국공산주의운동사>로 70년대에 이미 세계 학계에 필명을 날렸던 학자이자
미 의회 청문회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했던 인물로 한국 현대정치사 연구의 대가이다.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명예교수이자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로 있다

2012년 4월 3일 조선일보와 가진 이메일·전화 인터뷰의 내용 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김형아,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교 아시아-태평양학 대학원 정치사회변동학과 교수

"한국은 과거의 독재자가 사망한 지 겨우 20여년 후에

대다수 국민들이 그를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인정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박정희를 지배한 욕망은 근대화, 즉 ‘공업화를 통한 근대 한국’이었다.

그리고 근대화주의자 박정희의 심장 속에는 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근대화주의는 북한의 위협과 미국의 간섭이라는 상황,

가난에 대한 기억과  식민지 군인으로서의 치욕이라는 트라우마,

그리고 일본의 발전에 대한 선망 등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근대화 사업은 단순히 정권 연장 차원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달성했다.

 

박정희 찬양론자가 내세우는 공이란 다름아닌 박정희 비판론자가 강조하는 과에 해당하는

 유신독재 없이는 이뤄지기 힘들었다. 박정희는 산업화라는

 개인적 야망과 국가의 이익이 합치된 목표가 오직 유신 체제, 혹은


‘한국식’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믿음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이었다.

유신독재와 근대화가 병립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양날의 칼처럼 한 몸이었다.


한국인의 자신감, 효율성 그리고 견인력은 박정희가 70년대 벌였던 '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근로정신 캠페인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은 평가해야 한다.

박정희의 과가 많다.

하지만 적어도 식민지시기와 전쟁을 거치며 ‘짚신’ ‘엽전’이라며 

 열패감에 젖어있던 한국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시켜 준 계기가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국인들의 심성에 없지 않았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현실에서 힘을 갖게 한 계기가  박 전 대통령을 통해서였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혁명으로써 한국이 한세대 내에 경제기적을 이룩하도록 하였다.


이 혁명은 국가발전과 함께 박정희시대의 군사문화가 반영된 정치적 억압을

그 특징으로 한다. ‘할 수 있다’ 정신이 산업화뿐만 아니라  

민주화로까지 이어졌다. ‘할 수 있다’가
유신체제가 들어서며 ‘안되면 되게 해’로 바뀌며 국가 권력이 도덕성을 상실했고,

 애초의 ‘할 수 있다’가 가진 도덕성은 민주화 세력으로 넘어갔다.
한국의 현대 정치사를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사이의 갈등의 역사로 볼 수 있다면,

 

박정희는 갈등의 한 축인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였고, 그 결과로 자신도 희생당했다.

그가 주도한 근대화의 결실로 성장한 민주주의 요구가 그를 삼켜버린 것이다."

 

- 형아, 그는 박정희 유신 시절이던 1974년 독재국가인 한국이 싫어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하며

자신의 국가가 부끄러워 한국말조차 하지 않고 살려고 했지만 

 

박정희를 연구하면서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교 아시아-태평양학 대학원

정치사회변동학과 교수로 한국 리더쉽 포럼 소장이다

 

2009년 10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과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를 맞아 학술대회에 참석한 이후

10월 2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의 내용과 그의 책 <양날의 선택>의 내용 중

 

현승일, 국민대학교 전 총장

"불과 수억 달러로, 과거의 식민지 지배를 청산한다 하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내용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4.19혁명 당시 이제는 민주주의가 실현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0년 후 쿠데타가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과 미국이란 외국 세력들을 등에 업고,
권력 기반을 다지려 했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를 팔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원망은 없다. 독재같았지만 

그시대에 그럴수  밖에 없는  장점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일 조약이 체결되는 편이 옳았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경제 성장을 보고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 현승일,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및 서울대학교신문대학원 신문학 석사와

유타주립대학교대학원 사회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제6대 국민대 총장과 제9대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

 

국회의원과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국민대 사회과학대
사회과학부 사회학전공 교수와 미국 UC버클리 교환교수를 지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서울대의 리더였으며, 운동권으로 활동하며 내란죄로 체포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로 있다

 

ㅣ2008년 4월 29일 연재된 '[역사는 살아있다]
제9장 한일 국교 정상화 (上)'에 기재된 동아닷컴과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조남태, 한국형 전차 흑표의 개발자

 "박정희 대통령의 전력증강 8개년 계획으로 소총, 미사일, 전차 등이 국산화 되었고

해상, 해중 전력을 강화했다. 획기적인 자주국방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역사를 안 가르치는 것이 문제다. 역사를 모르니 현상을 모른다는 얘기다

 

누가? 요즘 한국 사람들이다. 박정희 시대를 제대로 돌이켜봐야 한다.

그래야 국가관과 사회관, 가치관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오늘의 경제대국이 있게 만든 박정희 시대를 외면하면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뒤늦게나마 KIST 출신 과학자들이
박대통령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지금은 대전으로 옮겼지만

 

국방과학연구소나 KIST나 같은 ‘홍릉 식구’ 아닌가.
평화란 전쟁에 대비하라고 적과 아군에게 똑같이 나눠준 시간이다.

 

이 시간을 정말 알뜰하게 썼던 분은 30년 전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 그 분이 오늘 너무 그립다.


숨어서라도 핵을 가지려 했던 박 대통령의 결연했던 눈매가 그립다.

그 단호했던 의지가 가슴을 파고든다.
현실적인 위협 앞에 선진국들 눈치만 보는 오늘의 한국이 너무 안타깝다."

 

- 조남태, 6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인하대를 졸업 및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ROTC로 장교를 갔다. 후에 국방과학연구소에 들어가 한국형 전차 흑표의 개발자로 국방과학연구소 한국형전차 개발단장을 지냈으며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정채위원과 (주)대명메디컬프라자 부회장,

서울산업대학교 산학명예교수를 지냈다

200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30주기를 맞아
뉴데일리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조갑제, 월간조선 전 대표이자 칼럼니스트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으며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

또한 그는 봉건적 잔재와 싸웠다." - 조갑제, 월간조선 전 대표로 1971년 부산 국제신보

 (국제신문의 전신)의 입사 시험에 1위로 합격하며 기자로 활동하며
입사 4년차인 만 29세에 한국기자상(7회)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를 비판한 글을 자신 만큼 많이 쓴 사람이 없다며,

사회부기자로서 권력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고문 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쫓아다니면서 기사를 썼다.

또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를 자청했던 것이 주요 동기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

ㅣ2006년 3월 5일 그의 사이트 ‘조갑제닷컴’에 올린 그의 사설 내용 중 

신중현, 한국의 '록의 대부'

"1972년 청와대 직원으로부터 박 대통령을 위한 노래를 만들라는 전화를 받았다.

공화당 인사로부터 같은 내용의 전화를 또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 왜냐하면 군사독재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이후 나의 노래들은 금지곡으로 묶였고,

해금이 되었을 때는 대중음악의 흐름이 바뀌어 설 곳이 없어졌다.


결국 박정희 때문에 내 음악인생이 큰 상처를 받았지만.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박 정희대통령을 존경한다. 전반적으로 크게 봐서 좋아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핍박받았다.
하지만 음악을 못하게 한 것은 작은 문제이다.

먹고 입을 것이 없었던 시대에는 우선 잘 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30년 동안 작고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급성장한 예는 없었다.

엄청난 업적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내 노래 ‘물 좀 주소’보다 줄 물조차 없었던 가난 극복이 더 절실했다.
우리나라에는 기본적으로 영웅이 없다. 모든 위대한 인물은 나쁜 일도 많이 했지만,

그가 이루어낸 좋은 일의 영향력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라에도 영웅이 필요하다."

신중현, 한국의 '록의 대부'로 불리는 가수 겸 작곡가, 기타리스트로

1963년 한국 최초의 록큰롤 밴드인 '애드포'를 비롯하여
덩키스·신중현·Big Band·The Men 등의 그룹사운드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한국적 록음악의 지평을 넓혔다.
'신중현과 엽전들'을 조직해 4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한국 록 음악사에 남을 대표작들을 남겼다

2005년 1월 27일 CBS 라디오 <김어준의 저공비행>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박정희 측근들의 평가(12인) >

고건, 제30·35대 국무총리이자 제22·31대 서울특별시 시장

 "나는 젊어서 60~70년대에 내무부 새마을 담당관을 맡아 새마을운동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으로 국민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는 성과를 내신 분이다.

박 전 대통령을 모시고 5년간 새마을운동에 열정을 쏟은 기억이 난다.


21번에 걸쳐 새마을사업 추진 현황을 보고한 것으로 기억한다. 매 회의마다

우리 농촌과 국토에 가졌던 뜨거운 애정, 빈곤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한에 가까운 처절한 심정,

 

그리고 빈곤을 극복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하려는 치열한 집념에 숙연해지곤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어린시절 동네 한 지주 집에서 모내기를 할 때면

마을 사람들의 품앗이에 아이들과 함께 따라가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지주 집에서 주던 밥과 반찬 이야기를 꺼내며

´호박잎에 얹혀진 자반고등어 한 토막이 그렇게 맛있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통령의 어린 시절 한과 가난극복에 대한 무서운 의지가 절실하게 다가왔다.

 

1979년 (대통령)행정수석비서관으로 있을 때 거의 매주 술자리를 했다.
대통령은 막걸리 혹은 시바스 리갈을 마셨고 가끔 흥이 나면 비장의 ´비탁 칵테일´
(맥주 한 병과 탁주 한 주전자를 섞은 것)을 직접 제조하기도 했다."
-

 

고건,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및 서울대학교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한 석사학위를 받았고

 원광대학교에서 법학 명예박사, 시라큐스대학교에서 법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 강원도 부지사, 전라남도 도지사, 청와대비서실 정무제2수석비서관,

국토개발연구원 고문, 교통부 장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


제12대 국회의원, 내무부 장관, 제22대 서울특별시 시장, 명지대학교 총장,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제30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제31대 서울특별시 시장,
국제투명성기구 한국본부 회장, 제35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에코포럼 공동대표,

 희망한국 국민연대 공동대표,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사회통함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기후변화센터 명예 이사장과 미국 시러큐스대학교 이사, 해리티지재단 자문위원으로 있다

 

2000년 민족중흥회 측의 요청으로 기고한 글이
당시 소식지 원고가 부족해 책으로 발간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2005년 민족증흥회 소식지인 민족중흥 신년호에 '박정희 대통령의 술과 한,
그리고 집념'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의 내용과 2006년 12월 8일

박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해서 했던 말 

이만석, 제16대 국회의장

"인간적으로는 아주 소탈하셨고 무슨 권위주의란 건 전혀 없었다. 인정이 많으시고

또 인간적인 의리도 있으시고 5.16 때 자기를 선별하겠다고 나선

1군 사령관 이한림 같은 사람을 건설부장관에 앉혀놨다.

인간적인 의리도 아주 있었고  용인술, 사람 쓰는 것도 잘 쓰고 머리가 좋았다.

박 전 대통령은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분이자 기초를 닦은 분이다.

그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장기집권이 문제였지만 박 전 대통령은 굉장히 소탈하고 청렴했다.

부정부패에 대해 철두철미했고

가족과 측근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엄격했다." 

 - 이만섭,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및 동 대학에서 정치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및 주일·주미 특파원을 거쳐 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과 한

국국민당의 부총재 및 총재를 역임했고 제14대 국회의장, 신한국당 대표서리,
국민신당 총재,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제16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2010년 4월 24일 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초대를 받아 말한 내용과
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30주년으로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김용환, 페어리이디킨슨대 명예경제학박사 학위 수여자로 당시 재무부 장관

"박정희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CEO)였다.

그는 주요 정책 결정을 할 때 반드시 관련자들과 심도 있는 토론과 협의 과정을 거쳤다.
그는 그는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은 아주 민주적이었다.

 

당시의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 공업화 및 방위산업 육성, 부가가치세제 도입 등

개발연대의 궤적을 장식하고 있는 정책들을 대부분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결정했다."

 

- 김용환, 서울대 법대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박정희 정권 당시에 재무부 이재국장,

상공부·재무부 차관,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재무부 장관 등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지냈으며

미국 뉴저지주 페어레이디킨슨대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ㅣ
김용환의 회고록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의 내용 중

 

남덕우, 제14대 국무총리로 당시 재무부 장관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도자로는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실천적 지도자로는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을 꼽아야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은 실사구시 가치관에 입각해 개화주의 노선을 이어 받은 지도자이다.
박 대통령의 치적은 한마디로 말해 북쪽의 무력적화통일 전략을 거부하는 안보태세를

확립하는 동시에 이 나라 국민을 전통적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성공한 지도자이다.


또 박 정권이 독재정권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독재라기보다 권위주의 정권으로 봐야 한다.
박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매도하는 좌파들은

무지막지한 김일성-김정일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박 대통령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인권유린, 정치적 탄압 등의 정치적 폐단이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권위주의 정치로 인해 무고한 피해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지금의 우리가 사과해야 한다.

 

일부 정치세력이 허구와 관념으로 과거를 평가하고
맹목적으로 과거의 지도자들을 폄하하고 있다.

이러한 그릇된 역사의식부터 고쳐나가는 것이 선진화의 과제라고 본다."

 

- 남덕우, 국민대학교 정치학 학사 및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와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대학원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민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강사,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초청교수,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위원, 제24대 재무부 장관, 제12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 국무총리 서리, 제14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한

국태평양 경제협력위원회 회장, 국정자문회의 위원, 외무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코리아헤럴드 회장, 제18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대한상사중재원 이사장,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이사, 재우회 회장, 제19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경기도민회 회장,
제20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한국무역협회 명에회장, 동아시아경제연구원 회장과

제1대 재경회 회장, 우석문화재단 이사, 동아대학교 이사, 제2대 재경회 회장,


동북아경제포럼 한국위원회 위원장, IBC 포럼 이사장을 지냈으며, 청조근정훈장과

수교훈장 광화대장, 제5회 한미우호상, 욱일대수장,


제21회 시장경제대상 공로부문상을 받았다. 현재 민족중흥회 고문, 한국무역협회 고문,

 전국경제인연합회 국내 원로자문단, 경기도민회 고문, 서강포럼 고문,
전국경제인연합회 윤리위원회 위원, 해공 신익희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한일협력위원장 회장,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으로 있다ㅣ2005년 6월 10일 세종문화회관 1층
세종홀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조찬세미나에서

'근대화와 박정희'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말했던 내용 중

 

도널드 그레그,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총책임자 

"당시 남한의 장면 정부는 매우 진보적이었지만, 강력하지 않았다.

북한이 이를 틈타 공격한다면, 남한은 무너졌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박정희의 쿠데타 동기 중 하나가 됐다고 본다. (쿠데타 당시)

 미 정부 안에서 두가지 반응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장면 정부가 (1960년 정권교체 이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국방성을 중심으로

 

 박정희가 반공 군부 지도자라는 점에서 북한으로부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고 본다. 박정희는 양면성을 지녔다.


박정희의 한쪽 면이 박태준, 남덕우, 정주영, 이병철이라면,

또다른 한쪽 면이 이후락, 박동선 등이다. 빛과 그림자다. 재미있는 이야길 하나 하겠다.

2001년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김정일은 그때 임 원장에게 ‘내가 인터넷으로 매일 남한 뉴스를 본다.
또 청와대 웹사이트도 흥미롭게 본다. 청와대 웹사이트에서 본 대통령 이야기 중

 나는 박정희에 대해 제일 감명깊게 읽었다.


북한에도 박정희와 같이 경제발전을 이룩해낼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박정희가 남한에서 이룩한 일에 대해 깊이 존경한다.
그런데 따님 박근혜씨가 정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박근혜씨가 북한을 방문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 원장은
이런 뜻을 박근혜씨에게 전했고, 박근혜씨가 이를 받아들여 2002년 북한을 방문했다.

박정희는 그러한 한국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대통령 3명을 꼽으라면, 박정희, 노태우, 김대중을 든다.

노태우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지만.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나는 그의 판단력, 전략적 감각, 한국의 경제발전, 그의 실용적 측면 등을 모두 존중한다."

- 도널드 그레그, 윌리암스대학대학원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CIA에서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있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 위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과 주한 미국대사관 대사를 지냈다.

 그는 한미협회 한미우호상을 받았으며 현재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으로 있다

 2011년 5월 12일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새뮤얼 버거, 당시 한국 주재 대사 

"장면 총리는 권력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는지 알지 못했다.

1961년 봄 장면의 선출을 환영했던 열광은 침울과 좌절로 변했다
. 5·16쿠데타는 기회주의적이거나 이기적인 군사지도자에 의한

단순한 권력장악이 아니었다.

한국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진정한 시도였다.


쿠데타는 젊은 세대 대 늙은세대, 근대화론자 대 전통주의자, 군부 대 민간인,

질서를 원하는 자 대 변화를 두려워하는자 사이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지 다섯 달이 되었다. 이 정권은 권위적이고 군사적인 면에서

대외적인 인상이 다소 나쁜 면이 있긴 하지만 정열적이고 성실하며

 

상상력과 의지력으로 꽉 차 있다. 이 정권은 일반 국민들로부터는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고 대중적 지지 기반도 없지만

진정한 의미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작하여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
전 정부하에서 토의되었거나 구상되었던 개혁 프로젝트들 은행·신용정책,

무역, 실업자들을 위한 공공 공사의 확충, 탈세대책, 농업과 노조 대책,

교육 및 행정부문, 복지(교도소의 개혁, 윤락녀 재활대책, 가족계획사업,

상이군경과 유자녀 지원)등이 실천되고 있다.
많은 개혁 은 긍정적이고 상당수는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들이다.

 

몇몇 개혁들은 뜻은 좋았지만 너무 급히 서두는 바람에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혁명정부는 그런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매점매석행위, 뇌물, 정경유착, 밀수, 군사물자 횡류, 깡패, 경찰 과
기자들의 공갈 행위에 대한 군사정부의 단속은 이미 효과를 내고 있다.

 

공산당의 침투공작에 대한 사찰활동과 반공선전의 질과 양이 모두 증가 했다.

군인출신 장관들은 행정을 유능하고 효율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우리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과로로 인하여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아 문제이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근 한달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 가장 유능한 장관중의 한 사람인  

정래혁 상공부장관은 내각회의중 쓰러졌다가 2주간의 휴식을 끝내고 현업에 복귀했다.
경제기획원 장관은 두 달간 휴식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박정희 의장도 과로로 인해 피로한 상태이다. 

" - 새뮤얼 버거, 위스콘신대학교 및
런던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영국 주재 대사관의 일등서기관, 일본과 뉴질랜드,

그리스 주재 대사관의 참사관 등을 지냈으며, 1961년 7월부터 1964년 7월까지
우리나라의 대사를 지내고 이후 국무부 극동문제 담당 차관보, 베트남공화국

주재 부대사로 지내다가 은퇴했다. 그는 한국 주재 제7대 대사로 재임시
제3공화국 탄생과 한일회담 타결에 기여하였으며,

 

그는 한국 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일어난 5.16,

즉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었으나 7월에 대사로 임명된 이후 이 생각을 철회했다

그가 1961년 10월 28일에 작성한 보고서

'한국의 변혁 : 1961~1965(The Transfonnation of Korea: 1961-1965)'의 내용 중

 

노태우, 제13대 대통령

"박정희는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배신감을 느꼈으며,

박정희가 유신으로 나간 것도 그런 동기가 깔려 있다.
민주주의라는 교과서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박정희를 독재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외국의 독재자들과는 전혀 완전히 다르다 전제주의자라고 해야할 것이다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그보다 훨씬 못한 시절에 야당 주장대로 민주주의식으로 했다면

나라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노태우, 육군사관학교를 나왔고 조지워싱턴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아시아협회 올해의 정치인상을 받기도 했다
1999년에 조갑제가 노태우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눈 내용을

 그의 조갑제닷컴 칼럼에 2006년 2월 3일자로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김정렴, 박정희 정권 당시 제4대 대통령비서실 실장을 지냈으며

‘박정희 경제사령관’의 총참모장으로 현재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

 

"1961년 1인당 국민총생산 89달러로 전세계 125개국 중 101번째였던

한국이 1979년 1인당 국민총생산 1510달러로 49위를 차지해
중진국의 선두주자로 나선 이유를 박정희 전 대통령의 18년간 통치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의 길이 조국 근대화에 있고,

대화의 길이 경제 자립에 있는 것이라면,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라는 3단계 목표를 설정했다.


박 대통령은 매우 검소한 분으로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 세 가지를 빼고는

모두 국산이었으며,  국산 넥타이를 매면 마디가 잘 풀려

상공부에 특별지시까지 했으나  

그때만 해도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 기술을 로열티를 지불하고 도입할 처지가 못돼
생전에 국산 넥타이를 마음껏 매보지 못했다.

 

또 박 전 대통령은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대통령 선출 방법과

유신헌법 개정문제 연구를 지시할 예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 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계자로서는 김종필 씨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강력한 정부 주도, 수출의 적극적 진흥, 수출지향적 공업화와 중화학공업 건설 추진,

 새마을운동, 사채 동결 긴급조치 등의 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잘살아 보자’고 호소하며 국민의 단결을 고무했다.


박 대통령 시대의 한국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미르달이 정의한 ‘경성국가’였다.


덩샤오핑은 한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박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실적을 높이 평가했다." -

김정렴, 오이타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클라크대학교대학원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동 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지냈다.

 1944년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 입행한 후 1980년 주일 대사를 사임할 때까지

34년간, 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 6개월 가운데 무려 16년 동안 차간 이상 고위 공직생활을 했다.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고 9년 3개월을 근속해 대통령비서실 실장을 지내며

 역대 최장수 비서실장 재임 기록을 세웠으며, 새마을운동, 산림녹화,
통화개혁 등에 직접 관여하는 등 ‘박정희 경제사령관’의 총참모장 역할을 했다.

현재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내고 있다ㅣ그가 쓴 회고록 책인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의 내용 중  

 

백영훈, 당시 경제개발계획 자문위원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다"며 "군인은 거짓말을 안 하니

나를 믿고 돈 좀 빌려달라"고 이야기했다.
사실상 박 대통령이 서독에서 일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들을 담보로 돈을 빌린 모양새였다.

 

박 대통령이 서독에서 고생하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고 괴로워했다.
서독 방문 이틀째 되던 날 박 대통령은 1000m 지하 갱도에서 석탄을 캐던 광부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광부들은 새까만 얼굴로 대통령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대통령이 그 모습을 보고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내려가다 결국 눈물을 흘렸다.

당시 박 대통령은 "여러분의 검은 얼굴을 보니 내 눈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열심히 해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며 연설을 끝마쳤다.

 

박 대통령은 서독 방문 기간 내내 쉬지 않았다.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직접 달려보며
도로 구조 등을 주의 깊게 봤고, 공장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박 대통령은 나에게 "우리라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지 못하란 법이 없다"고 수시로 말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으로 분류됐고
안보 위협도 받던 때였다. 민주주의는 당연히 중요한 가치지만

것만을 위해 정치를 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박 대통령의 단점으로 ‘남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단점때문에  박 대통령이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일리가 있다."

- 백영훈,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후 국내 국비 해외장학생 1호로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3년 만에 독일 에르랑겐 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중앙대학교 상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 박정희 대통령 눈에 띄어 경제개발계획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한-독 교류에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경부고속도로 건설입안 과정에 처음부터 참여했었다.
1976년 정계에 입문해 제 9, 1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중소기업정책위원회 위원장,

 

(재)한국방위산업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산업개발연구원(KID)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ㅣ2009년 10월 20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김종신,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 및 청와대 사회문화 담당 비서관

"박 대통령을 수행해 필리핀 마닐라로 갈 때 일이었다.

베트남 참전국 정상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기내에서 대통령이 갑자기 찾았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좀 하려고 한 거였다. 대통령 전용칸으로 갔는데,

대통령이 찬 시계와 내 시계가 비교가 되었다.


나는 그때 '영시의 횃불'로 돈을 벌어 금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대통령 시계는 유리에 금이 간 군용시계였다. 번쩍번쩍하는 금시계를 보고

대통령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내가 얼른 '각하, 저하고 시계 바꿉시다' 했다.
그랬더니 성을 팍 내면서 '금시계 차면 제일인가, 시간만 맞으면 되지'라고 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참 예의가 바르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사람이 된 거였다. 항상 정자세이고 사람을 똑바로 쳐다봤다.

걸음걸이도 반듯했고. 사관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말수가 적어 상대방 얘기를 몇 시간이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부하한테 함부로 말을 안 놓았고 담뱃불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여간 배울 게 많았다. 참 멋있는 사람이라 생각해 자주 찾아갔다.
만나면 주로 군대 썩은 얘기를 하고 나라 걱정을 많이 했다.

한번은 내가 물어봤다. 일본 군대 뭐 하러 들어갔냐고. 독립운동하러 간 거냐고.
박 대통령 말이, '독립운동은 무슨? 왜놈들 밑에서 하도 더러워서 긴 칼 차러 갔지' 하더라.

 나는 그게 솔직한 답변이라고 본다. 만주군에 있을 때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 시기엔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독립군도 없었다는 거였다.

 

당시 실력이 없어 그렇지, 실력만 있다면 다들 일본 육사 가고 군수 하려 했다.

사범학교가 가장 우수했고 그 다음이 상업학교, 농림학교였다.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건 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

당시 광복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일본놈이 되는 줄 알았다고. 학생들의 꿈이 소년항공대 입대였다.

 

박 대통령은 일본사람을 꼭 '왜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고속도로 자체보다 그것이 국민에게 희망을 준다는 데 더 기뻐했다.


그때 내가 한 가지 지적은 했다. 상하 도로 경계선에 놓인

중앙분리대 면적이 너무 커서 차선 폭이 좁다고. 중앙분리대에는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땐 잔디가 아니라 전부 나무였다. 차가 많이 다니면 나무가 살기 힘들 텐데

이 많은 나무를 어떻게 키울 거냐고 대통령에게 물었다. 대통령도 내 지적에 동의했다.


대통령은 정말 고속도로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5·16 당시만 해도 수출이라곤 오징어밖에 없었다.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에.
박 대통령은 어릴 때 가난하게 산 것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래선지 머릿속에 잘살아보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박정희대통령이  경제기반을 닦은 건 대단히 높게 평가해줘야 한다.

박 대통령은 '우리 군대는 우리 국민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라며

'국의 우방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는 거'고, ' 

조를 받더라도 배짱을 튕기며 받아야지 왜들 꼴사납게 꼬리 치는지 모르겠다' 했다.

 

'담배와 성냥개비, 양초가 우리한테 무슨 큰 도움이 되냐'

'조를 제대로 하려면 비누공장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언제까지 얻어먹고 살 거냐,

빨리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했다.
언제는 박 대통령이 '선거 때마다 돈이 엄청 들어간다'며, '

부정부패가 다 선거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유신을 단행한 거다'라고,
'내가 개인적으로 필요한 돈은 주식이 공개되지 않은 두 회사에서 받는다'고 했다.

 전철을 타면 박 대통령을 생각하고 자세를 반듯이 한다.
그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게 영광스럽고 고맙다.
후손이 내게 뭐 했느냐 물으면 '박정희 대통령 모시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일하고

또 일했다'고 말하겠다." 

김종신, 동아대학 법학과 학사학위를 받고
육군 대위로 예편을 한 이후, 부산일보 정치부 기자, 한국문화방송 기자,

서울신문 기자, 부산일보 편집부국장를 지내는 등 청와대 출입기자 및
청와대 사회문화 담당 비서관을 맡았으며,
부산문화방송 사장과 한국방송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2011년 11월 25일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김성진,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9년 넘게 보좌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급속하게 경제발전이 잘 된 것은

고급 두뇌들의 역류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으킨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과거 우리나라도 다른 후진국들과 마찬가지로 공부한 사람들이

전부 외국으로 빠져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뒤 외국에 있는 고급인력들을 끌어오기 위해

장관보다 많은 월급을 주면서 그들을 불러들여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그 사람들을 묶어서 공업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농업개발에 힘을 기울인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원인이다. 고급 두뇌들의 역류 말이다." - 김성진, 고려대학교 영문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석사와 헝가리국립과학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동양통신 기자와 정치부 부장, 청와대 공보비서관과 대변인, 문화공보부 장관과

 동양통신 사장, 연합통신 사장,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장,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
서울언론재단 이사장, 주싱가포르 대사관 대사,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신아시아연구소 고문,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를 지냈고,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ㅣ
1979년 10월 19일,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던

김성진이 한 말의 내용 중 

임방현, 당시 대통령 공보수석 비서관

"나이 여든을 넘은 지금까지 박대통령을 잊지 못한다. 젊은시절 신문기자로

5.16직후부터 박대통령을 주목하다 관심을 갖게되고 나중에는 완전히 매료되었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 때 청와대 홍보비서실 초청 모임에서

"자동차 국산화를 추진하는 나라에서 장관들은 모두 외제차를 타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박대통령이 이 말을 전해 듣고 장관들과 고위 공직자들의 관용차를 국산차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때 나는 박대통령이 판단이 서면 바로 실천에 옮기는 지도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KBS TV의 ‘경제가 먼저냐, 민주주의가 먼저냐’는 토론프로에 출연하여
소련의 예를 들면서 "군사력이 앞선다고 선진국이 될수 없고

경제와 소득이 뒷받침돼야 선진국이 될수 있다"는 요지로 토론했다.

어느날 청와대 언론인 초청모임에 갔더니 박대통령이 "임위원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하더라.

 

박대통령을 근엄하고 무섭다고들 했지만 남에게 다정다감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다.
박대통령을 ①혁명가 ②경제가 ③민족중흥의 영웅으로 본다.

 

일부에서는 박대통령이 "경제는 잘했으나 정치는..."이라고 비판하지만


국가재건과 조국 근대화 신념에서 보면 자유 민주주의의 겉옷이 중요하기 보다도  

자유민주주의가 될 수 있는 몸통부터 키워야 한다고 믿고 설천했으니 혁명가가 아닌가.
또 경제가라는 측면에서 박대통령은 철저한 '실사구시'었다.

박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중화학공업건설 등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세력들과 싸워가면서 이룩했다.
당시 반대론자들은 한일국교 정상화도 굴욕외교라고 비판했지만

 대일청구권 자금이 이 시절 경제건설의 중요한 종자돈 구실을 한것이 '실사구시'가 아니냐.


박정희 대통령을 민족중흥의 영웅이라고 보는것은

조국근대화 과정의 집념과 투지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세광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먼저가고홀로 보낸 5년은 너무나 고독했다.

 

막걸리와 맥주를 섞어 이를 '비탁'이라고 말하고 마시면서

"은퇴하면 새마을 강연이나 다녔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박대통령은 언제나 모자를 벗고 답례하는 예절이 몸에 베어 있었다."

 

 - 임방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하버드대 니만 펠로우를 연수했으며,

1952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부터 조선일보, 한국일보를 거쳐 1970년 청와대

신회담당 특별보좌관, 대통령 공보수석 비서관 등을 지냈다.

 

 뒤 11,12대 민정당의원, 한일의원연맹 운영위원장, 대한민국 헌정회 부회장,
자유수호국민운동 공동의장 등의 경륜을 쌓았다ㅣ

2011년 10월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회장 김정렴)

초청 연설에서 연사로 나서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평가(20인)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당시 푸틴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책을 있는 대로 다 달라고 했었다.

국가가 대기업을 키우고 경제발전을 주도했던 한국경제 발전 방식에 관심이 있어 했다.
현재 가즈프롬 등 에너지기업 국유화를 통한 발전 방식은 좋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 이석배,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주 러시아 참사관과 주 유고 참사관,

주카자흐스탄 공사와 주상트페테르부르크총영사관 등을 지낸 동구권 전문가다

 

1990년대 초반, 이후 대통령으로 8년간 통치를 하며 에너지산업인 석유와 가스 등

 전략적 자원을 국유화하는 등 강력한 개발독재식 모델을 택하여

특별한 경제성장을 이룩, 압도적인 지지로 연평균 6%의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외환보유고 2257억 달러로 세계 4위를 기록한 푸틴이

당시 레닌그라드대(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 국제문제 보좌관으로 일할 때

 그가 주카자흐스탄 공사를 지낸 이석배 공사에게 했던 말

 

덩샤오핑, 중국 지도자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즉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따라가야 한다."

 박정희대통령의 새마을 운동등 경제개발계획을 답습해야할 필요가 있다- 덩샤오핑,

중국의 지도자로 개혁개방을 하여 지금의 중국을 만든 장본인

1992년 남부지방 광둥성 시찰 길에서 했던 말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중국이 올해 최대 역점사업인 농촌 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한국의 '새마을 운동' 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후진타오 국가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등이 잇따른 농촌 순시와 집단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  

신농촌과 조화 사회 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농촌 살리기를 첫 번째 정책 목표로 삼고 있다.

 

중국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을 단장으로 한 시찰단이

 지난해 5월 한국에 파견돼 새마을운동 현장을 견학한 뒤 당 중앙에 2건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한국이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통해 시멘트와 철강을 농촌에 지원해  

기반시설을 건설하도록 한 것을 시작으로 30여년간의 도시화와 공업화 과정에서

도시-농촌 경제의 협력 발전과 도시-농촌 소득의 동반 상승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설명돼 있다." - 2006년 2월 14일 홍콩의 친 중국계 신문인 문회보에 보도된 내용

 (2006년 2월 14일에 YTN에 보도됨) 

"후 주석은 2006년 2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접목해 '신농촌운동'을

추진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새마을운동과 이를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존경은 대단하다고 한다.  

그 해 2월 14일부터 일주일간 후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등 최고지도부는

 31개 성·시 간부 200여명과 합숙하면서 새마을운동의 역사와 성공요인을 학습하기도 했다

 

. 중국은 3년간 3만명의 농업 관련 공무원들을 연수시키고

앞으로도 35만명을 연수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중국은 2005년,2006년

 

박 전 대표의 중국 방문 때마다 새마을운동 관련 책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박 전 대표가 직접 책을 골랐고, 가져간 책 상자만 해도 세 개나 되었다.

"- 2008년 1월 25일 주간조선에 실린 기사의 내용 중

 

시진핑,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와 부주석  2016현재 주석

"과거 한국에 왔을 때 박근혜 전 대표와 오찬을 준비하면서 시진핑 부주석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새마을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시진핑부주석은 대체로 한국 경제 발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박 근혜 전 대표가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설명하면 질문이 많았다."

 

- 구상찬,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학사 및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문화체육부장관 비서관, 한나라당 정책위원장 보좌역과 수석 부대변인 및 시당 대변인, 서울시당 뉴타운 정책개발위원장,

 

강서(갑)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과 동국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겸임 교수,

박근혜 전 대표 공보 특보, 이명박대통령 중국 특사,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 한나라당 제2정조위 부위원장, 국회 한중문화연구회 회장, 한나라당 통일위원회 통일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 제18대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있다

 

2010년 10월 21일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에 출연해서 칭화대학 화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

 

및 현재 중국 제19대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교장과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 중국 부주석과 중

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있는 시진핑이

한국에 왔을 때 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가진 오찬에서의 일과 관련해 했던 말의 내용 중

 

                                    리콴유, 싱가포르의 총리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  소모합니다.

한편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리콴유, 래플스대학교 학사와 캠브리지대학교 법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싱가포르에서

인민행동당을 ?당, 사무총장이 되었고 입법평의회 의원,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 주정부 총리,

 총리를 32년간 지냈고, 이후 싱가포르 고문장관을 지냈다. 그는 자원도 없고 땅도 없던 싱가포르를 32년간 통치하며 세계 최고의 경제적, 청렴도 강국으로 만들어 선진국으로 만든 장본인

 

 지금의 싱가포르를 만든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그의 아들 리센룽이

 리콴유의 뒤를 이어 국민들의 지지 아래 총리로 있다ㅣ1979년 10월 19일,

한국을 방문한 이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가진 환영만찬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한국을 떠나면서 박 대통령의 국가와 국민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박 대통령 서거는 한국민에 커다란 손실이며 한국의 경제사회적 발전이 계속되길 희망한다."

- 리콴유, 싱가포르의 총리ㅣ박정희 대통령이 10.26으로

김재규에게 시해를 당한 이후 당시 싱가포르의 총리였던 그가 한국 정부에 보낸 조전의 내용 중

 

"아시아에서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나는 등소평을 먼저 꼽겠다.

그 노인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험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다. 만약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수상을 꼽겠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글쎄.. 언급하지 않겠다. 이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현재 한국의 국내 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으므로.."

 

- 1994년 1월 19일 대우그룹 부회장으로 있던 박정희 정권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있었던,

1991년 주싱가포르 대사로 임명받은 김성진과 재회한 뒤에 그와 가진 인터뷰에서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했던 말의 내용 중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

"아시아 지도자들은 국가 근대화에 가장 신경을 쓴다. 그 과정에서 부패나 권력남용 등

잘못도 일어난다. 사람은 권력을 잡으면 이를 남용하려는 유혹이 커진다.

마오쩌둥이나 이승만, 박정희 같은 지도자들은 권위주의적이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한국이 처음부터 민주화가 됐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다.

  박 장군은 강력한 지도자였다.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를 증진시켰다." 

북한보다 못살았던 그 시절 반공과 경제개발을 위해 그렇게 해야만 가능한 선택이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의 총리로 약 20년간 독재를 하면서 IMF도 독자적 조치로

극복하며 IMF로부터 인정을 받고 빈국이었던 말레이시아를 신흥공업국으로 발전시켜

50% 극빈자를 10% 내로 감소시키고 연평균 7%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말레이시아에서 '국부'로 통한다ㅣ2000년 3월 27일

조선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조선일보와 가진 특별 인터뷰의 내용 중 

훈센, 캄보디아 총리

"가난을 경험했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캄보디아는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한국은 전쟁 후 빈 손으로 일어선 나라고 캄보디아 역시 내전 후 재건을 위해 노력 중이다.

 

캄보디아 경제 발전을 위해 여러 사례를 연구했는데 한국이 캄보디아와 유사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모델을 많이 따르고 있다."

- 훈센, 순천향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우석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를 받았고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을 수립, 캄보디아 부총리와 외무부장관, 총리, 인민당 중앙위원회 부의장과 의장을 지냈다.

현재 캄보디아 총리로 있으며, 훈센은 좌익 무장 단체인 크메르루주의 통치로

초토화된 캄보디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5월 29일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역동적 리더십은 한국민을 아시아의 경제 기적을 일으키게 한 능력과 열망을 불어넣었다. 박 대통령의 통치기간 이룩한 한국의 발전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었다."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대학교에서 법률학을 전공하였으며, 태평양전쟁 당시 바탄에서

일본군 포로가 되었으나 탈주하여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이후 정계에 발을 들여

하원의원, 상원의원, 자유당 총재와 상원 의장을 지냈다.

국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21년간 장기집권을 하였다ㅣ

 

박정희 대통령이 10.26으로 김재규에게 시해를 당한 이후

 당시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그가 한국 정부에 보낸 조전의 내용 중 

나빈 람굴람, 모리셔스 총리

"박 대통령이 이끈 한국의 경제사회적 발전은 개발도상국들에게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 나빈 람굴람, 그의 아버지는 모리셔스에서 초대총리를 지냈으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끌어내 국부로 추앙을 받는다. 그는 의사로서 활동을 하다가 영국의 공인된 의료업계 평가기관인 GMC

(종합의료협의회)에 1년 내내 등록되는 성과를 달성하였다. 이후 법학으로 전공을 바꿔

영국 런던에 있는 LSE(런던경제학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다시 정계에 발을 담아

노동당 당수로 재직하며, 압승을 이끌어 총리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0.26으로 김재규에게 시해를 당한 이후

당시 모리셔스의 총리였던 그가 한국 정부에 보낸 조전의 내용 중

 

윌리엄 톨버트, 라이베리아 대통령

"박 대통령은 한국의 중대한 경제발전과 제3세계 국가들 간 협력을 증진시켰다.

그의 부재는 아시아 및 세계의 손실이다." -

 윌리엄 톨버트, 미국에서부터 이주된 해방 노예의 자손으로 태어나

라이베리아 대학교에서 최우등으로 졸업, 이후 정치에 참여한다.

라이베리아 유일의 합법 정당이던 진실 휘그당에 들어가 터브먼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에 임명되고 이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침례교 목사가 되어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세례 세계 얼라이언스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통령이던 터브먼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진보적 개혁을 추진,

최초로 야당 창당을 허용했다 정희 대통령이 10.26으로 김재규에게 시해를 당한 이후

당시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었던 그가 한국 정부에 보낸 조전의 내용 중

 

멜레스 제나위, 에티오피아 총리

"한국의 개발경험에 큰 관심이 있다. 경제개발과 관련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배울 점이 있다고 믿는다.

한국은 1960년대 아프리카보다 가난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어떻게 빈국인 한국이 부국이 됐는가에 관심 있는데 이런 움직임은

박 전 대통령 때 시작됐다. 한국과 에티오피아의 차이점은

 

 한국은 6ㆍ25 전쟁 이후에 성공적인 개발정책을 취했다는 점이다.

에티오피아는 내전 등을 겪었고 과거 정부의 정책은 개발로 이어지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와 한국 군인들은 60여 년 전 한국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렸다.

 

 이제 에티오피아가 한국의 경제 개발 경험을 배워 가난의 고리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다.

 한국의 경제개발 모델을 에티오피아에 적용해 한국처럼 잘사는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로써 혈맹으로 맺어진 양국 관계가 한 단계 올라간 새로운 지평에 도달하게 된다.

 

 개발이 반드시 민주주의를 희생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빈국이 선진국이 되도록 이끈

정치적 리더십을 배우고 싶다." - 멜레스 제나위, 아디스아바바대학교 의학 및 공개대학교 경영학 석사와 에라스무스대학교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인민혁명민주전선에서 활동하다가 에티오피아 대통령을 지냈다. 과거 그는 8년 동안 에티오피아가 10% 이상 고도성장을 구가하게

만들었다. 현재는 에티오피아 총리로 있다

2010년 11월 29일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 참석차 방한한 멜레스 총리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진행된 국내 언론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독서가 취미인 그는 한국경제발전 과정을 담은 900쪽 분량의 영문 서적을 읽고

 경제보좌진에게도 이 책을 읽도록 권해 참모들이 한국대사관에 긴급 요청을 한 적도 있다."

- 정순석,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학사를 받았고 제12회 외무고시를 합격,

 외교통상부에서 일을 하며

주수리남 대사관 서기관과 참사관, 주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영사,

주파키스탄 대사관 공사참사관과 주라오스 대사관 대사,

대구광역시 국제관계자문대사를 지냈고

이후 주에티오피아 대사관 대사를 지냈다

2011년 7월 7일 정순석 주에티오피아 대사와

 멜레스 제나위 총리의 경험에 대해 연합뉴스에 실린 기사의 내용 중

 

조제프 카빌라, 콩코민주공화국 대통령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내 롤모델이다." - 조제프 카빌라, 탄자니아에서

군 교육과정을 습득한 이후, 중국 베이징의 국립국방대학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인 전임 대통령 로랑 카빌라가 암살당하였고,

 

 이후 출범한 과도정부에서 29살의 나이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취임 후 르완다 등

외세를 물리치고 반군 세력과 평화협상을 벌여 내전을 진정시키는 등의 업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2006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44.8%의 득표율 및 결선 투표에서 58% 특표를 얻어 당선, 1960년 6월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지 46년만에 처음 실시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다.

그는 킨샤사 주재 한국대사관 관계자에 의해 

'콩고민주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불린다.

 

한양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를 받았다ㅣ벤더빌트대학교 대학원 국제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제23회 행정고시 합격, 금융감독위원회 공보관과 감독정책2국 국장,

증권선문위원회 상임위원, 금융위원회 상임위원,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을 지냈고

재무부장관 표창, 대통령 표창,  

홍조근정 훈장,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글로벌경영부문을 수상한

한국수출입은행 은행장으로 있는 김용환이 2012년 4월 11일 매일경제에 올린 사설에서

 

지난 7월에 이명박 대통령이 아프리카를 순방할 때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해

콩고민주공화국의 대통령 카빌라로부터 들은 내용을 언급한 내용 중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한국이 우즈벡의 최고 경제파트너이다. 일본보다는 한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으며

한국은 우즈벡에 12억달러를 투자한 최대 투자국이다.

카리모프 대통령이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중요시하고 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기를 많이 읽으며 박정희식 발전 모델을 참고로 하고 있다."

- 최영하, 트로이주립대학교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예비역 장군으로 있으며,

주 우즈베키스탄 대사와 초대 주 러시아 국방무관을 지냈다1999년

 12월 18일 영남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나의 비전은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인 무하마드 알리 지나(Ali Jinnah)가 제시했던 것과 같다.

 파키스탄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켜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풍부한 인적 자원과 천연자원을 갖추고 있어,

선진국가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어렵던 시절 한국을 이끌어 고도로 공업화된 민주국가로 변화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는 후임 대통령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유산을 남긴,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라호르의 크리스천 대학을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파키스탄 국립국방대학과

영국의 왕립국방대학을 졸업햇다. 이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야전 포병 연대 중위로 참전, 육군 특수부대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인도와의 국경지역인 카슈미르에 새로 설립된 육군특수부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승진해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이때부터 군부 강경파의 핵심인물로 부상, 당시 총리 나와즈 샤리프가 그를 해임하자

 

무혈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부를 출범시켜 파키스탄 대통령을 지냈다. 인도와

영토분쟁을 벌여온 카슈미르 문제와 우발적 핵무기 사용 방지대책 등을 위해

 정상회담을 여는 등 의욕적인 대외활동을 펼쳤고 경제회복 및

부패척결을 최대 과제로 삼고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9.11테러 당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자 종교적 동질성과

미국의 대 테러전쟁

협력 요청 및 경제적 지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미국을 지원하였다.

 

2004년에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에서 당선되어

재취임했고, 이후 임기를 마쳤으나 정국 혼란이 계속되자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비상사태를 선포, 조기 총선을 약속했으나 부토 총리의 암살 등 악재가 계속 일어났다.

 

이후 총선 결과 야당이 압승하여 그에 대해 사임 압력이 거세져 

그를 탄핵 소추를 추진, 견디지 못해 사임했다2003년 11월 5일

중국을 방문하고  6일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서 내한한 그를

그의 숙소 하얏트호텔에서 조선일보와 단독으로 가진 인터뷰에서 '

박정희 전 한국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에 대해 답한 내용 중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

"요즘은 박정희 대통령이 좋게 인식되는 것 같은데, 옛날에는 유신이니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초기 새마을 운동을 한 덕택에 경제 발전의 기초가 되었던 점은 훌륭한 점이다.

 

나도 영화를 통해 서울을 보았는데, 서울은 일본의 도쿄보다 훌륭한 도시로

조선이 자랑할 만한 세계의 도시이다. KBS가 제작한 '영상 실록' 가운데

박정희 편을 구해달라. 박 대통령의 평가는 후세가 할 일이지만

그 시대, 그 환경에서는 유신인지 뭔지 그런 길밖에 없었다.

 

민주화도 무정부적인 민주화는 좋지 않다.

 한국을 방문하면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갈 것이다. 그것이 예의이다." 

 

- 김정일,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을 전공했고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

 선전선동부 과장과 부부장, 문학예술부 부장, 선전선동담당 비서, 정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으며, 김일성 사후 북한의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ㅣ1999년 10월 1일 평양을 방문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나눈 대화의 내용과 2000년 8월 12일 평양시내의 목란관에서

오찬을 겸한 회담을 하기 전에 접견실에서 김정일이 방북 언론사 대표단과

나눈 대화의 내용과 2002년 5월 13일 북한의 평양을 방문한  

박근혜가 머물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을 찾아 했던 말의 내용 중

 

김대중,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물러난 대통령은 모두 부정적인 평가만 받아 왔지만 공적은 평가해야 한다.

지지 여부를 막론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6·25의 폐허 속에서 근대화를 이루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나는 박 전 대통령과 진심으로 화해했다." -

김대중, 에모리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 정치학 박사,

가톨릭대학 법학 명예박사, 원광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포틀랜드주립대학교 인문학 명예박사,

시드니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경희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 고려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

 

조지타운대학교 인문학 명예박사, 워시본대학교 인문학 명예박사, 캠브리지대학교 명예박사,

 영남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남개대학교 명예박사, 공주대학교 교육학 명예박사,

 목포일보 사장, 흥국해운 사장,

 

한국 해운조합연합회 이사,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민주당 기획위원과 대변인, 제5대 민주당 민의원, 제6대 국회의원, 민중당 대변인, 제7, 8대 국회의원, 재미한국 인권문제연구소 창설,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제13대 국회의원,

신민당 총재, 제14대 국회의원, 케임브리지대학교 객원교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아시아 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 명예이사장, 제1대 새천년민주당 총재,

 대한적십자사 명예총재,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무궁화 대훈장,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국제평화상, 제7회 만해상, 늦봄 통일상, 코리아 소사이어티 선정 밴플리트상,

 제1회 자유상,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노벨평화상, 제1회 동학혁명대상을 받았다.

 그는 과거 박정희와 대선을 겨루기도 했고,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납치되기도

 했으며,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 및 전두환 정권 때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

 

1999년 5월 1박 2일 일정으로 대구·경북을 방문해 지역 원로,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노무현,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지난달 연세대에서 열린 박정희 평가 학술대회에서 주목을 받은 바 있는 여교수(김형아ㆍ

호주 국립대)는 그후 필자를 만난 자리에서 재임기간 5년 동안 23차례에 걸쳐 49개국을 순방,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다 해외방문 기록을 갖고 있는 노무현과의 대화를 꺼내며

"봉하마을의 노무현을 만났더니 외국에 돌아다녀 보니

 

외국 지도자들이 온통 박정희 얘기뿐이더라라고 하면서 순진하게 웃더라"라고 했다." 

 - 김인만, 건국대학교 축산과를 중퇴했고, 출판사에서 오랜 세월 책을 만들다가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원래는 동화작가로 활동을 하다가 박정희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은책으로  제3회 동쪽나라문학상 수상작인 장편동화 <날개없는 천사의 노래>와,

 박정희 테마에세이집 <임자, 막걸리 한잔 하세> 등이 있다

2009년 11월 9일 데일리안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김형아 교수에게 말을 해서,

김형아 교수가 김인만 작가에게 말한 내용에 대해 쓴 사설의 내용 중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한국이 성공한 데는 많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유엔 일부 직원들에게 아프리카 국가들이 한국 성공사례를 배울 것이 없는지에 관해

얘기해왔다. 빈곤 퇴치를 위해 한국(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반기문, UN사무총장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 및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를 받았고

페어리디킨슨대학교와 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받았다.

그는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무부에 입부, 주인도 대사관 1등 서기관과

 

외무부 국제연합과 과장, 국무총리비서실 의전비서관, 주미국 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

외무부 미주국 국장, 외무부 장관특별보좌관, 외무부 외교정책실 실장, 외무부 제1차관보,

 대통령비서실 의전 수석비서관과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대사 겸

 

주비엔나 국제기구대표부 대사, 외교통상부 차관, 제56차 UN총회 의장비서실 실장,

외교부 본부대사,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으며, 녹조근정훈장,

홍조근정훈장, 오스트리아 대훈장, 브라질 리오 블랑코 대십자 훈장, 코리아 소사이어티 밴

플리트, 페루 태양 대십자 훈장, 제6회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최고대상,

 

잡지인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상, 제1회 포니정 혁신상, 국제로타리 영예의 대상,

 필리핀 최고의 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UCLA 메달,

탁월한 국제지도상을 받았다.제8대 UN 사무총장

 

2008년 3월 10일, 유엔 본부에서 열린 빈곤ㆍ질병 퇴치를 위한 `새천년개발목표`

아프리카 주도그룹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경제 발전과 초고속 인터넷 접근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인 한국에서 배울 점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했던 말의 내용 중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의 총리

"박 대통령은 1960∼70년대를 통해 우수한 지도력으로 한국의 발전을 이끈 인물이며,

 일한우호관계 증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 오히라 마사요시, 도쿄 상과대학을 졸업한 이후

 관리가 되었다. 이후 정계에 발을 들여 일본 자유민주당 보수파 주류로서 통산장관,

재무장관 등을 역임하였고 총리를 지냈다. 외무장관 재직시 한일국교정상회담에서 활약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0.26으로 김재규에게 시해를 당한 이후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그가 한국 정부에 보낸 조전의 내용 중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박 대통령은 미국의 확고한 친구이자 협력자였다. 그가 한국 경제를 놀랄 만큼 발전시킨 역할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지미 카터, 조지아공과대학교 학사 및 해군사관학교 학사학위를 받았고

 핵잠수함 시울프호 수석 장교, 조지아주 주지사를 지냈으며, 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대통령 임기를 마친 이후 에모리대학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초당파 비영리 기구

 카터 센터를 설립했다. 지미 카터 특별건축사업 시행을 했으며,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ㅣ박정희 대통령이 10.26으로 김재규에게 시해를 당한 이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그가 한국 정부에 보낸 조전의 내용 중

 

                         (세계 석학들의 평가(10인) 

카터 에커트,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석좌교수 

 "그가 금전면에서 매우 자신에 엄격했고 검약했으며 정직했다는 면에서

후임자인 전씨와 노씨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와 기업의 돈을  

모두 국가의 경제발전에 쏟아 넣었을 뿐 개인의 치부로 악용하지 않았고

이 사실은 지금 그의 유족들의 생활을 통해 입증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 박정희에 대한 노스탤지어(향수)가 고개를 드는 건 바로 이 점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 국민들이 명확한 권위나 비전, 강력한 리더십이 없는 국가 지도자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도

 이런 노스탤지어 탓이라고 본다." - 카터 에커트, 로렌스대학교 서양사 학사 및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서양중세사 석사와 워싱턴주립대학교대학원 박사를 받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현재 우드로윌슨센터 연구원과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석좌교수로 있다

          1997년 11월 1일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미국 예일대학교 역사학 석좌교수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불과 20년 만에 세계적인 무역국가가 되었음을 경이롭게 본다." - 폴 케네디, 옥스퍼드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미국 예일대학교 역사학 석좌교수로 있다ㅣ그가 저술한 책

 <강대국의 흥망>의 내용 중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

"자유를 좀 누르더라도 경제를 회생시켜야 한다고 봤던

박 대통령에 대해 말을 하자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러시아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시 박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헨리 키신저,

하버드대학교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국제세미나 이사,

미국 록펠러브로더스펀드 특별연구프로젝트 이사, 미국 대통령보좌관 및

 미국국가안전보장회 사무국장, 미국 국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노벨 평화상과 대영제국 훈장,

독일 명예시민, 우드로우 윌슨상,

 밴 플리트상을 받았으며, 현재 보헤미안 그로브 회원, 미국 외교협회 회원,

 아스펜 연구소 회원, 빌데르베르크 그룹 회원으로 있다

1999년 10월 23일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에즈라 보겔

"박정희는 의심할 바 없이 한국 근대화의 길을 돌파해 낸 핵심 지도자다.

그럼에도 박정희 시대는 한국 사회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공과에 대한 논쟁은 여전하다.

그런 탓에  박정희 시대를 균형 있게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당시 한국은 철저히 통제된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다만 박정희는 전제주의적인 면에 가까운것 같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

민주적인 정부하에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기 어려울 때가 많다.

독재적인 리더십은 잔혹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결국 좋은 것으로 결과를 맺을 때가 있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

그때 기회를 놓쳤다면 한국의 산업화는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 에즈라 보겔, 오하이오웨슬리안대학교 학사 및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예일대학교 조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박사 후 연구원,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 리서치 센터 소장, 페어뱅크 센터 소장, 아시아센터 소장을 지냈다.

 

그는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인물이다.

현재는 하버드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2006 년 11월 11일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과

            2011년 3월 20일 중앙선데이와 가진 이메일 인터뷰의 내용 중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그는 소농 출신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신분상승을 위해

일본 군인이 됐었다. 그의 인권탄압이나 독재정권이라고는 하지만 전제적이라 하겠다

그는 진정으로 국력을 키웠다.  

그는 다른 후진국 지도자와 달리 부패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국의 정책자문가들이 철강 산업같은 중화학공업정책을 반대했을 때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가기간산업을 키워냈다.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정책은

 1930년 당시 일본의 만주 산업화정책과 닮았다. 사실 박정희가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교육받고 근무할 당시 만주는 10%의 산업성장을 거듭했다. 그는 독재자이자 산업화의 지도자였다.

 박정희의 경제적 유산은 상당히 좋다.

한국인들이 박정희를 칭송하는 것을 이해한다.

 

 한국은 그가 집권하기 전에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집권 20년 만에 신속히 산업화가 이뤄졌고, 특히 1970년대의 중공업 육성은

 한국을 산업국가로 자리매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박정희가 칭송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브루스 커밍스, 미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전공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로 미국내 몇 안되는 한국전문가이다. 그는 한반도내 미국의 역할을

비판적 시각으로 다뤄 주한미군 철수 및 광주민주화운동 미국 개입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미국 워싱턴대학교 교수, 시카고대학교 교수, 노스웨스턴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의 노만/에드너 프리링 석좌 교수이며,

 노스웨스턴 대학의 국제/비교 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을 수정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저술해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비판적 아시아학'의 대표적 인물로 한국학의 권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미국의 독재국가에 대한 태도

또한 서슴없이 비판하였다

2006년 8월 14일 문화일보와 가진 8.15 기념 인터뷰의 내용과

2012년 2월 22일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윌리엄 오버홀트, 미국 하버드대 연구원이자 미국 최고의 중국 전문가

"1973년 한국에 처음으로 온 이래 거의 매년 서울을 방문하면서 한국경제발전 전략에 대해

연구를 해왔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한국의 오늘은 박정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늘 민주주의를 얘기하는데

민주주의는 극단주의적인 빈곤과 갈등이 있는 곳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박정희의 정치적 배경은 아주 극좌였던 것은 사실인데 중요한 것은 그가 정치적 입장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경제가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한국을 살릴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그게 중국의 덩샤오핑도 모방하는 아시아의 모델이 된 것이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박정희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에 큰 인상을 받았다.

 

이는 ‘박정희 모델’로,

등소평은 한국의 박정희 모델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중국의 근대화 전략은 바로 박정희 모델을 벤치마킹한 데서 시작한다.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사유화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이 강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이 약하다.

 

 셋째, 후진국엔 분별력 있고 교육 받은 중산층이 적다. 

이 세 가지 문제가 합쳐져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는 ‘포퓰리스트 장벽(Populist Barrier)’이다.

박정희가 바로 개도국에서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다. 

박정희가

지금도 일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윌리엄 오버홀트,

하버드대학교 사회과학 학사 및 예일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랜드연구소 박사로 수석연구원 겸 아시아태평양정책센터 센터장,

 미국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 교수와  

 케네디정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을 지내고 있다. 미국 최고의 중국 전문가로 명성이 높으며,

뱅커스 트러스트, 노무라 등과 같은 글로벌 금융기관에서

 경제분석가와 투자전략가로 30여년간 활동했으며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대외정책 자문위원,

카터 미국 대통령 후보 선거 캠프의 참모로 있었으며 반한파에 속한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국제고문단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2011년 5월 31일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과

그의 책 <중국의 부상(The Rise of China>의 내용 중

 

엘빈 토플러, 미래학 분야의 최고 석학으로 세계적인 미래학자

"박 전 대표의 선친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를 높이 평가해 왔다." - 앨빈 토플러, 뉴욕대학교

학사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에서 명예박사,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명예박사, 서강대학교에서 경영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백악관 담당 정치, 노동 문제 기자와 '미래' 지의 부편집자, 코넬대학

초빙교수로 있었다. 그는 법학과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사회사상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 메달'을 수상했다.

 미래학 분야의 최고 석학으로 꼽히는 세계적인 미래학자이다

2006년 12월 15일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허먼 칸, 미래학자로 유엔미래포럼을 창립한 인물

"리콴유 수상은 기개가 높고 자존심 강한 인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은근한 경쟁의식도 갖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싱가포르가

한국보다 앞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비교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듯했다.

우리 외무부가 리콴유 수상을 초청하려 외교 경로를 통해 수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보류되곤 한 데서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초청을 수락한 데는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허만 칸이 리콴유 수상에게 "당신이야말로

 

한국의 박정희를 만나야 할 것 같다. 내가 보니 대단한 사람이다.

만나면 서로 의기투합할 것이다."라고 권했던 것이다.

허만 칸의 권유에 리콴유 수상은 한국 방문을 수락하게 됐다. 허만 칸 덕분에

한국의 외무부도 체면이 살았다." - 김성진, 고려대학교 영문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석사와 헝가리국립과학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동양통신 기자와 정치부 부장, 청와대 공보비서관과 대변인, 문화공보부 장관과 동양통신 사장,

연합통신 사장,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장,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 서울언론재단 이사장,

 

주싱가포르 대사관 대사,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신아시아연구소 고문,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를

 지냈고,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ㅣ캘리포니아공과대학 졸업 후 물리, 공학, 수학 등을 전공하여

 

란드코퍼레이션 연구원을 지냈으며, 미국의 유력 시크탱크인 허드슨 연구소를 설립, 주재하였고

 미국 군사기관인 랜드 연구소에서 일했고 국방총성과 원자력위원회 등의 위탁으로 전략연구와

 

미래학 연구에 종사하였던 저명한 미래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유엔미래포럼을 창립하였고,

 미래학을 현실에 적용시킨 최초의 미래석학으로 개발도상국을 지원한 경제학자이며,

 

 냉전당시 비관론이 판치던 세계석학들을 낙관주의적 시각으로 되돌려 놓은 장본인인 

허먼 칸이 싱가포르의 총리 리콴유에게 했다는 말을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던 김성진이 월간조선 1999년 9월호에서

리콴유가 한국을 방문한 계기에 대해 설명한 글의 내용 중

 

"허먼 칸은 늘 우리에게 '한국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한국인들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상상할 수도 없는 에너지가 지도자에게서 나오는데

 한국의 박정희대통령 같은  리더십

그것이 바로 한국을 성공적인 국가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민들은 그 어느 나라 국민과는 견줄 수 없이 너무나 열심히 일한다'고 말했다.

 말을 할 때 그는 엷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가 많은 것을 알고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시 잘 몰랐다.

 왜냐하면 한국은 당시 100등 이하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고,

.북한보다도 GDP가 낮았을 때였기 때문이다." - 제롬 글렌, 아메리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고 세계미래의회 의장, 세계미래연구기구협의회 회장과 밀레니엄 프로젝트 회장,

 

유엔미래포럼 회장으로 있다. 미래학자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학교사였던 허만 칸 미래학자의 수제자로 허드슨연구소에서 미래연구를 함께 시작하였다. 미래 연구를 시작한 것이

1960년대이므로 현재 40여 년간 미래예측을 하고 있다. 그는 그의 스승 허만 칸과 함께

 

한국의 경제발전을 미리 예측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미 예산과

 정책을 만드는 것을 알고 이를 과감하게 예측했기 때문이다

2010년 11월 29일 영남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허먼 칸이 평소에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나'라는

          질문에 대해 답한 내용 중

제롬 글렌, 미래학자로 유엔미래포럼 회장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중 한 명이었다.

미래학을 배우지 않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래학적인 개념과 비전으로 

한국을 이끈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과감하게 미래를 내다본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존재하였기에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민주적인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엘빈 토플러는 '민주화란 것은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되어야 한다.

 

이를 가지고 독재라고 매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아울러 카터 전 미국대통령 수석비서관을 지낸 오버홀트 박사(미국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 선임 연구원)는  

'박정희의 근대화 성공으로 중산층이 창출되고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박정희야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196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이 한국의 녹색성장 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새마을 운동으로 주거환경이 개선됐고 수로시스템이 정비됐으며,

여기에 그린벨트 정책으로 녹색 지대를 많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녹색성장 정책은 새마을 운동과 연결된다.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경북 구미시 인근 김천시에 세계기후변화 종합상황실이 문을 연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 제롬 글렌, 아메리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고 세계미래의회 의장,

세계미래연구기구협의회 회장과 밀레니엄 프로젝트 회장, 유엔미래포럼 회장으로 있다.

 미래학자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학교사였던 허만 칸 미래학자의 수제자로

허드슨연구소에서 미래연구를 함께 시작하였다.

미래 연구를 시작한 것이 1960년대이므로 현재 40여 년간 미래예측을 하고 있다.

 

그는 그의 스승 허만 칸과 함께 한국의 경제발전을 미리 예측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미 예산과 정책을 만드는 것을 알고

 이를 과감하게 예측했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29일 제주에서 열린 전경련

'2010년 제주 하계포럼'에 참석해 했던 말의 내용과

2010년 11월 29일 영남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의 내용 중

 

껑투웬, 미국 조지메이슨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한국의 박정희는 번영(prosperity)의 기초를 놓았지만

 베트남의 호치민은 빈곤(poverty)의 기초를 쌓았다." - 껑투웬, 젊은 학생 시절에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호치민에 심취했던 불교계의 젊은 지성이었으며, 이후 그는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불교학계에서 촉망받는 인물로

베트남 출신의 미국 조지 메이슨 대학교 종교학 교수이다ㅣ2003년 8월 19일 연세대학교 신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유니언신학대학대학원에서 석사와 캘리포니아대학교샌타

 

바버라교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조지메이슨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와 종교학과 학과장, 한국연구소 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회장, 북미한인기독교협회 회장을 지내며,

 

제6회 율곡대상 학술부문을 수상했던 노영찬이 문화일보에

자신이 존경하는 베트남 출신의 학자 껑투웬이 한국에서 호치민 전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했다는 말을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이외에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45인)
이은상, 시조 시인으로 역사학자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세종이 어째서 성군이고 위인인가. 한글을 창제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어째서 성웅이고 위인인가. 왜적을 물리쳐 나라와 백성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종과 이순신을 합친 것보다도 더 월등한 업적을 쌓은 위인이 바로 박정희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훌륭한 업적이지만, 그를 성군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성군이라면 정치를 아주 잘했다는 최대의 찬사인데, 세종이 과연 그런 칭찬이 합당할 만한

 정치업적을 쌓았는지 의문이다. 정치를 잘했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백성들이 모두 등 따숩고 배부르게 해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당시 전국의 인구가 불과

 250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계층이 아니면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때에 굶어죽은 백성들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오니

성군이란 칭찬이 무색하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박정희는 1961년에 혁명정부를 세우고 불과 20년만에 우리 국민의 숙원이던

 보릿고개 극복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세계 각국 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놀라며 칭찬할 만큼

우리 국민을 잘 살도록 만들어놓았다.

 

박정희는 다른 방면으로도 특출한 업적을 많이 쌓았지만, 이 경제문제 하나만으로도

 세종보다 월등 위인 소리 들어 마땅하지 않은가. 이순신은 임금으로부터 버림받아

두 번이나 백의종군하면서 스스로 거북선 만들고 각종 무기도 개발해

왜적과 23번 싸워 23번 모두 승리한 업적을 세웠기에 성웅이고 위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어떤가.

 1961년 집권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보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훨씬 열세였다. 그렇던 것이, 이제는 김일성이 감히 싸울 생각을 못할 정도로

남과 북의 처지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전쟁에서는

 피 흘리지 않고 이기는 면승을 제일로 꼽으니만큼,

그런 면에서 박정희가 이순신보다 월등한 업적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정희를 세종과 이순신을 합친 정도의 위인으로 평가해야 한다."

 - 이은상,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 시조 시인이자 사학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고 풀려났고, 계명구락부 조선어사전 편찬위원, 동아일보 기자, 조선일보사 편집국고문, 출판국 주간이었고 호남신문사창간,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전남대학교 재단이사장, 대구청구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사단법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사단법인 신문학원 이사, 이한응열사숭모회 회장, 한국시조작가협회 회장, 대종교종경종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회원, 광복회 고문, 통일촉진회 최고위원을 지냈다.

 그는 대한민국 예술원 문학공로상과 한글공로상, 5.16민족상과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았고

경희대학교에서 문학 명예박사, 연세대학교에서 문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주옥같은 시조와

산문으로 국문학계의 거봉

 

일제시대 때 학도병으로 끌려가 상해에서 해방을 맞은 뒤 광복군에 투신한 이후 육군에 투신,

장교로서 6.25전쟁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뒤 준장이 되어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과 함께

. 5.16에 가담하였고, 이후 공화당에 입당하여 대한민국의 제6, 7, 8, 9, 10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농림부장관을,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최장 국회부의장을 역임, 헌정회 명예회장과

 자유수호운동본부 회장 등을 지낸 장경순이 쓴 회고록 <나는 아직도 멈출 수 없다>에서

 그와 각별한 사이인 노산 이은상 선생이 병석에서 했다는 말의 내용을 회고한 부분의 내용 중

 

이현희,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

"5.16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낙후 퇴보한 최빈국 상태의 한국사회를 근대화시켜 놓았다. 기술경제 관료들과

 

산업기술 인력이 마련, 조합되고, 행정조직과 관료체계는 선진국 형으로 정비되었으며,

비약의 원동력인 사회적 생산능률과 고용창출이 눈부시게 높아졌다.

 

 박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위한 선장으로서 수천 번 이상 직접 회의, 점검, 확인, 출장을 가면서

진두지휘하였고 크고 작은 일을 성과있게 챙겼다.

 

그의 독특한 '성공달성'의 통치 이념과 철학에 따라 전문 학자, 행정관료,

외국유학파가 그 앞에 모여 사심 없이 함께 나라 발전을 오순도순 모색, 계획하고 실천하였다."

 - 이현희, 고려대학교 사학과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사학과 석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를 받았고 석오이동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열사기념관 설립기획위원회 위원, 동학학회 회장,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회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 중앙연구원) 역사연구실장, 미국 하버드 대학 연경연구소 초빙교수, 일본 됴코여대 객원교수, 중국 칭따오 대학 객원교수, 일본 호세이

 

대학 오키나와연구소 연구교수, 타이완 국립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에서 초빙 연구원으로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를 했고,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사교육강화위원회 위원, 한국민족운동 사학회장, 김구기념사업회 이사,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이사, 6.10만세기념사업회장,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인문과학연구소 소장과 인문과학대학 학장, 사학과 명예교수를 지냈다. 그는 독립운동가였으며,

 서울시문화상과 516민족상, 의암 유인석학술대상, 치암학술상 등을 수상했고,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정통하여 저서 77권, 논문은 230여 편을 쓰는 등 한국 근현대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저서 <이야기 한국사>는 수백만부가 팔려나가, 

청소년과 국사입문자들이 많이 읽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ㅣ그의 저서 <박정희 평전>의 내용 중

 

설봉식, 중앙대 경영경제대학 명예교수

"박 대통령은 한국경제를 후진국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현대화된 잘사는 나라

경제강국으로 가는 길을 연 위대한 지도자다.

근대화와 개혁을 꿈꾸며 모든 분야에서 봉건적이고 낡은 생산양식, 불합리성,

저생산성 요소를 없애는 개혁, 혁명으로 대전환을 이룩했다.

경영(management)의 의미가 사람을 잘 쓰는 데 있듯

 

박 전 대통령은 인적 자원을 잘 조직하고, 그 생산성을 높여

대한민국 경영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돈은 ‘버는 일’보다 ‘쓰는 일’이 더 어렵다.

 

박정희정부는 70년대 당시 국민의 소비욕구를 최대한 자제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공업화 전략에 나라 돈을 집중적으로 썼다.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은

 

박정희 시대에 이룬 압축성장의 귀결로 봐서는 안된다.

오히려 박정희 시대 이후 이어진 몇몇 정부가 불균형 성장 전략을 마감하고

양적인 성장에서 질적인 발전으로 서둘러 성장의 길을 수정하지 않은 데서

또 다른 근원을 찾아야 한다." - 설봉식, 중앙대학교 산업과학대학 산업경제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캠브리지대학교대학원에서 경제학 연구과정을

 거쳤다. 한국산업개발연구소 연구원, 중앙대학교 산업경제학과 학과장, 미국 스탠포드대

 

객원연구원,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캠퍼스) 교환 교수, 중앙대학교 학생처장, 산업연구소장,

 산엽경영대학원장, 산업과학대학 학장, 한국생산성학회 회장, 학국유통학회 초대회장, 중소기업청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생산성학술상과 유통산업학술상을 받았다. 동포사랑 회장을 지냈고,

 

현재 중앙대학교 산업경제학과 교수, 한국기업윤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경제연구소 이사장,

 WEA(미국 서부경제학회) 아시아 위원으로 있으며, 중앙대학교 명예교수이다

2011년 11월 22일 구미시가 주최하고 영남대 박정희리더십연구원 주관으로 열린

'국가지도자 리더십과 국가발전'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했던 말의 내용과

 그의 저서 <박정희와 대한민국 경영>의 발문 내용, <박정희와 한국경제>의 내용 중

 

송복,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오늘날 사람들은 오로지 민주화투쟁만으로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하지만

민주화의 기초를 닦은 것은 산업화를 이룬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기아 때문에 일어난 4.19와 기아에서 벗어나자고 한 5.16은 같은 맥락이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에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민주주의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인권 유린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며

 

그 시대는 그 시대의 잣대로 봐야 한다. 5·16은 정변이며 혁명이었다. 비합법적 수단으로

합헌정부를 전복시켰다는 점에서 쿠데타이지만 이후 산업화를 성공시키고 국가 개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근대화 혁명이었다." - 송복,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서울대학교신문대학원에서 문학

석사를 받았고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사회학 석사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명예교수이다ㅣ

2005년 3월 10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조찬강연회에 강사로 나서서 했던 말의 내용과 2011년 5월 16일 5.16 50주년을 맞아 열린

 ‘박정희 통치철학 국제포럼' 토론회에서 주장했던 내용

 

이영선,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군사정변 후 민생을 도탄에서 건진 점 등을 내세웠는데

그것은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봐야 한다. 굶는 사람들이 많을 경우

진정한 민주주의를 시행하기는 몹시 어렵다고 생각한다.

 

인도가 좋은 예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승만 정권은 기초를 닦고,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를 했고,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정부주도적 경제개발계획이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를 강제로 조정하며 거시적인 경제적 안정을 추구했다는 점을 평가할 수 있다."

- 이영선,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메릴랜드대학교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은행 행원,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경제연구소 연구원과 수석연구원, 한국국제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연세대학교 조교수와 부교수, 교수 및 상경대학 교학과 과장, 한국무역연구원

 

초빙연구원,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북한센터 소장과 통일연구원 부원장과 원장, 기획실 실장, 연세대학교국제대학원 원장,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BK21단 단장과

 

국가관리연구원 원장, 한국경제학회 회장, 제7대 한림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한국경제학회

 

청람학술상과 글로벌 리더쉽 어워드를 수상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2007년 8월 6일과 8일에 12월 대선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와 관련해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한상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진보성향의 대표적 학자

"박 전 대통령은 자연사가 아니라 특수한 형식으로 운명했기 때문에 여러 감상에 젖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단순히 부국강병과 경제 성장으로 만족하는 시대가 아니고, 민주주의나

 인권 등 보편적 가치 추구가 강화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박 전 대통령의 부정적 유산은 지금도 남겨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부정적 유산을

철저히 연구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요구되는 양면성이 있는 시대이다.

 

새로운 국가 건설의 물질적 토대를 박정희 정부 시기에 만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 시기를 지나면서 경제적 도약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를 좀 더 여유있는 눈으로 보고 싶은 욕구도 있는 만큼

앞으로 좀 더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평가의 방법으로는

1973년부터 시작했던 종합정책, 근대화 과정에 미친 영향을 촘촘히

다시 연구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한상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학사 및 미국 남일리노이대학에서 푸코와 하버마스 관련 학위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민의 정부 시절 노사정위원회와

 

제2건국위원회 등에 참여했고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임명받았으며 원로학자나 전직총리가 임명되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에 발탁되었고,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및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으로 진보성향의 대표적 사회학자이다.

 서울대 사회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며, 중산층이나 민중과 구별되는 참여지향적 성향의 '중민'을

사회 개혁의 원동력으로 본 중민이론으로 유명하여 2010년 2월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한상진 사회이론연구소'를 창립해 연구를 계속해 왔다. 한상진 교수를 주축으로 사회학 법학

행정학 정치학 사회복지학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공익재단법인 '중민 사회이론연구재단'을

창립했고, 이사장으로 있다 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정길생,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및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우리나라를 선진 산업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과학기술 기반 구축에 끊임없이 노력한

 한 지도자의 뜨거운 과학 사랑과 눈부신 업적을 기술한 이 책은 우리들의 심장을 감동으로

 고동치게 하고도 남는다.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들과 모든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오직 미래에 대한

 비전과 사명의식으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그 분의 삶을 통해

독자들은 오늘의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정길생, 건국대학교 축산학 학사 및 교토대학교 대학원 가축번식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 발생공학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건국대학교

 

축산대학 조교수, 부교수와 과학기술처 생명과학정책수립위원회 농업분과위원, 대한불임학회 회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대의원, 과학기술처 생명공학위원회 위원, 동물자원연구센터 소장,

 

 과학기술처 한일기초과학교류위원회 생물분과위원, 한국가축번식학회 회장, 대한불임학회

명예회장, 건국대학교 축산대학 학장, 과학기술처 특정연구개발사업심의위원회 심의위원,

 

농림수산부 축산발전심의위원회 심의위원, 건국대학교 생명과학연구원 원장, 과학기술처 중간진입전략 기획자문위원회 위원, 대통령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과학기술처 생명공학종합정책심의회 위원, 교육부 학술진흥위원회 농업분과위원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학술위원회 위원, 과학기술처

 

 과학기술세계화 및 중간진입전략 기자문위원회 위원, 생명공학연구소 기관운영자문위원회 위원, 건국대학교 부총장, 한국축산분야학회협의회 회장, 과학기술처 생명공학연구기획단 단장,

 

아시아동물생물공학회 회장, 한국축산학회 회장, 세계축산학회 이사, 농림부 21세기농정자문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한국축산학회 학술상, 연구공적상, 한국가축번식학회 학술대상과 국무총리 표창장을 받았고, 현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건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박정희와 관련된 책 <과학 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의 출판사 서평의 내용 중

 

신복룡,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박정희가 꿈꾼 사회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였다.

빈곤 퇴치는 그가 살아야 할 존재의 이유로 보인다.

유신의 기원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추진 역시 국방과 수출산업 강화를 위해서였다.

 

박정희는 산업화 과정에서 미완의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좀 더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필요성이 유신(維新)으로 귀결됐다.

 

 박정희는 국가의제 설정에 성공했고 그 방향으로 국가와 사회의 편제를 재구성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지도자이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도 분명하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의 아린 상처를 남긴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는 오랜역사성을 가진 집단 따돌림이었다.

 

호남 푸대접의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뒤집어 씌우기로 한다면

그 이전에 이미 호남 출신의 학생이나 신혼부부들이 타지에서 하숙집이나

전셋집을 얻기 어려웠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신복룡,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총무처 고등고시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정치학회의 이사 및

감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있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 건국대학교

 

출판부장, 대한민국 학술원상 심사위원,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건국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다. 현재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로 있다ㅣ2011년

 

5월 13일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5.16 50주년을 맞아 주최,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5.16과 박정희 근대화 노선의 비교사적 조명'이라는 학술행사에서 했던 말의 내용과

2011년 11월 25일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과

2001년 6월 22일 동아일보에 올린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

훈요십조와 지역감정' 연재 글의 내용 중

 

노재봉, 제22대 국무총리이자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통해 국가기반능력을 구축한 2단계

혁명 과업을 이끈 지도자이다. 서방에 속하지 않은 국가 가운데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농경사회를 산업사회로 바꾸는 산업화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한국은 강한 국가권력의 주도로 산업화를 추진하면서도

건국의 기본이 된 자유민주주의 이념만은 훼손하지 않았다." - 노재봉,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및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대통령 비서실장, 제2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제14대 국회의원,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디지털학교 총장을 지냈다ㅣ2008년 8월 4일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정원에서 열린

 '건국 60년, 60일 연속 강연'에서 강연자로 나서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세계사적 의의'를 주제로 했던 강연의 내용 중

 

이달곤, 경원대학교 행정학과 석좌교수이자 전 한국행정학회 회장

"박정희 체제도 초기에는 설정이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

쿠데타후 군사정권을 수립했을 때 내건 슬로건은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개혁과제도 모두 거기에 맞춰져 있고, 그런데 이것을 둘러싸고 정파간 싸움이 많았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기 좌표로 안보와 경제를 내걸었고, 이것은 상당부분 실천됐다.

다른 군사정부에 비해 다행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는 거다." - 이달곤, 서울대학교 공학 학사 및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와 이스트캐롤라니아대학교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하브더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채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와세다대학 방문교수,

 

미국 일리노이스대학교 연구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학자, 미국하버드대학교 EEPC Research Associate, 21세기위원회 위원과 간사, 국가공기업 평가단 평가위원, 한국정치학회 상임이사,

 한국정책학회 총무위원장, 한국행정학회 연구위원장, 서울특별시 분쟁조정위원회 위원,

 행정안전부 정책자문위원과 국가전문행정연수원 지도교수, 경찰개혁위원회 위원, 4대 사회보험

 

통합추진기획단 위원,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원장, 국무총리실 정책평가위원회 위원, 공공기술연구회 이사, 중앙공무원교육원 겸임교수, 한국행정학회 회장,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법무

행정분과 위원, 제18대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제18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제18대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대표 특보단, 한미 FTA TF팀 한나라당 부위원장,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냈다. 현재 제9대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이사장과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 민간위원, 경원대학교 행정학과 석좌교수, 하이닉스 사외이사,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있다ㅣ2007년 8월 6일과 8일에 12월 대선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와 관련해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이성무, 제7대 국사편찬위원장

"앞으로 500년 우리 역사가 지나서 그때 가서 가장 위대한 역사 인물을 이야기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단연 으뜸가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기록에서 찾는다.

 

국사편찬위원회라는 곳은 기록을 보존하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갖고 있는 기록이

500년이 가고 그 이상을 지나도 아무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때문에 당연히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 1964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1979년까지 거의 매 달 빠짐 없이 월간경제동향보고와

수출진흥확대회의를 개최했다. 국내외 시장정보를 종합하고,

부정부패와 부처 이기주의를 제거해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정부의 개발에 대한 집염과 도덕성 때문에

한국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성무, 서울대학교 사학과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사학과 석사, 국사학과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성고등학교 국사 교사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동아문화연구소 연구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조교수,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부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대학원 교수와 교수, 도서관 관장, 백과사전 편찬부 국장, 부원장, 원장대리, 원장을 지냈으며,

 

조선시대사학회 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과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다ㅣ2009년 10월 20일 차흥봉 전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조찬강연으로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어제와 오늘' 제하의 강연에서 했던 말의 내용과

2008년 6월 5일 사이트 '과천문화원'에 <대한민국 60년사>라는 주제로 올린 글의 내용 중

 

                                       최진, 대통령리더쉽연구소 소장

"박정희 정권에서 강력한 추진력을 필요로 하는 정부주도 국책사업들이

 유난히 많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국가적 과업이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식 밀어붙이기와 같은 추진력이 돋보였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추진력이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높이 평가한다.

 

 박정희 시대의 대형 국책사업들은 순간적인 파괴력을 필요로 하는

플러스형 리더쉽의 결단력이나 돌파력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며,

 

지속적이고 강력한 마이너스형 리더쉽의 추진력을 필요로 하는 사안들이 대부분이었다.

 장기간에 걸쳐 기획·추진·저항·관철의 다단계를 거쳐 가시적인 결과를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남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뒤에 결정을 내리되,

일단 결정하면 확고부동한 의지로 목표를 향해 밀어붙였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리더십을 가졌다고 평가하는 대통령은 누구인가'

이 질문과 관련해 조사를 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단연 1위고,

김대중 대통령이 2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

 

박 대통령의 경우 18년 간 집권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경제적인 공을 세운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 내가 정책비서실의 국장을 했다." - 최진, 고려대 법대 졸업 및 동대학원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대중 정권 때 청와대 국정홍보비서실과 정책비서실, 정부혁신지방

분권위원회 정책홍보실장의 공직을 거쳐 숙명여대, 경희대, 고려대(연구교수)에서 강의를 해왔다.

 

지도자의 리더십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리더십의 최고 전문가이다. 현재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과 사단법인 한국리더십개발원 원장, 경희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서 대학강의 외에

 칼럼기고, 방송출연, 교육특강을 하고 있다ㅣ2012년 3월 18일 뉴시스와의 인터뷰 내용과

 브레이크 뉴스에 '박정희 리더십과 국정운영스타일' 분석 5탄 연재의 내용 중

 

이영훈,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교수이자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5.16은 쿠데타다. 이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이후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적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성장 잠재력'을 극대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성장 잠재력'을 현실화할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

다른 후진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쉽게 찾을 수 없는 군인 출신 정치가들의

강력한 개발의지가 작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규장각 조교,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전임대우교수와 조교수, 경제사학회 연구이사,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부교수와 교수, 일본

경도대학 경제학부 방문교수를 지냈다. 한국경제학회 청람상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교수로,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2011년 5월 13일 5.16 50주년을 맞아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주최한 '

5.16 군사정부의 정책 구상과 실제'라는 주제의 학술행사에서 발표했던 내용 중

 

김훈, 소설가로 밀리언셀러 작가

"비참하게도 우리 시대의 물적토대의 역사는 우익이 만든 거다.

좌익이 반항하더라도 우익 토대 아래서 반항한 거라고. 그리고 한국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5,000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다.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다.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 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다.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다." - 김훈, 고려대학교 영문학을 중퇴했고 한국일보 편집국 문화부

기자, 독립신문 시사저널 편집국장 이사, 시사저널사 사회부 부장, 시사저널사 편집국

국장직대, 시사저널 편집국 국장, 편집 이사, 시사저널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편집국 특집부

 

부국장, 국민일보 출판국 국장, 국민일보 편집국 편집위원, 한국일보 편집국 편집위원, 시전문계간지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편집국 민권사회2부 기동취재팀 부국장급을 지냈으며, 동인문학상,

 

제18회 서울언론인클럽 언론상 기획취재상, 제28회 이상문학상, 제15회 대산문학상, 제29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로 선정이 되는 등 현재는 소설가로 왕성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소설책 <칼의 노래>는 독자가 100만 명이 넘어서면서 밀리언셀러가 되는 기염을

토해 명실상부한 이 시대의 소설가가 되었다

2004년 12월 29일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홍하상, 베스트셀러 작가

"요새 일부 정치권과 국민들의 ‘짠’ 평가와는 달리 외국,

특히 경제개발이 지상과제인 아시아권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따라하기’가 유행인 현장을 봤다.

 

박정희식 개발 모델은 아시아권에서는 하나의 모범 사례였을 정도로

 그는 외국에서 탁월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덩샤오핑,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싱가포르의 리콴유, 파키스탄의 무샤라프가

한국식 개발 모델을 따른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CEO의 업적이라는 것은 통상 수치로 말하는 게 관례다.

 

박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공과를 수치로, 즉 하나의 주식회사로 보면

박 전 대통령이 CEO를 맡아서 그만둔 사이에 각종 수치는 천양지차로 변했다.

직원들의 월급은 12배, 매출은 166배로 늘고 회사의 업계 순위는 72위에서 17위로 올라섰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은 도덕성으로 무장한 CEO, 즉 청렴한 독재자였다.

박 전 대통령이 보통의 CEO와 다른 점은 특히 우리의 감동을 자아낸다.

 

그가 시해됐을 때 남긴 별 볼일 없는 유품이 말해주듯,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 홍하상,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KBS 출판부 '여성백과' 기자, MBC 교양제작국 작가를

 지냈으며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이다. 그는 24년간 다큐멘터리 및 논픽션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는 동안 방송위원회 우수기획상, MBC방송대상 다큐멘터리 부문 작품상,

 

한국일보 백상출판문화상 등을 받았다. 그는 여행에서 일반 여행자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에

관심이 많으며, 다큐멘터리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그 나라의 역사, 문화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2007년 현재 삼성경제연구소의 '세리CEO'에서 '상인열전'을

 

강의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특히 정주영과 이병철, 박태준 등 한국 재계 인물의

전기를 통해 현대사를 조망해오고 있으며, 그의 책들은 미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베트남,

태국, 러시아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특히 2004년 출간된 <이병철 경영대전>은

그해 경제경영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ㅣ2005년 2월 3일 세계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박효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1960년대 초 한국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2가지 선택지에 직면했었다.

 박정희 정권의 가치선택은 산업화였고, 그 선택은 희생을 동반했지만 현실성이 있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산업화는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 그 정신에 따라 산업화를 추진한

 

박정희 정권에게 그 시대의 모든 모순과 문제를 떠넘기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무조건 예찬하자는 게 아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얘기하자는 것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30년 전에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다. 그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건 개인의 선호 문제다

 다만 엄연한 사실을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박정희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의 번영과 자유,

 

그리고 우리들 가슴에 충만한 자신감은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산업화시대에 모래와 진흙뿐인 국토에 삽질을 하고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고속도로를 만들고

 자동차와 배를 만들면서 느꼈던 자부심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때 우리 대한민국은 독수리처럼 거센 날갯짓으로 솟아올랐다. 열정으로 헌신한

독수리같은 영웅들에 의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

그 선두의 리더 박정희는 <변신>의 작가 카프카에 비유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조국 체코인들의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 싶어한 간절한 변신의

몸부림인 것이다. 박정희는 영웅이다.

 

유신시대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양날의 선택>의 저자 김형아 교수(호주 국립대)의 말을

 빌리고 싶다. "누이가 공장에 가서 받은 월급으로 대학을 나온 동생이 누이를

 왜 공장에 보냈느냐고 대드는 것 같은 철없는 짓"인 것이다.

 

18년 장기집권이면 누구나 박정희처럼 할 수 있다는 말이 비판자들로부터 나오는데,

김일성 38년, 마르코스 22년, 미얀마 네윈은 26년인데 다 우리보다 잘살았던 그들의 빈곤을 보라.

 

 정치란 인간이 혼신을 바쳐서 할 수 있는 가장 영웅적인 행위다.

진정한 대통령이라는 모델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박정희다.

비관과 패배주의에 매몰된 국민에게 자신감을 주고

민족정기를 일으킨 업적은 일제시대의 행적을 덮고도 남는다.

 

허망한 공리공론으로부터 깨어나라. 오늘의 번영과 자유, 지구촌을 누비는

한국인의 자신감은 산타클로스가 갖다준 게 아니다. 우리 앞에 서 있는 박정희를 똑바로 보자.

 

 박정희기념관이 없다고, 박정희 동상이 없고, 지폐에 박정희 도안이 없다고

국민의 가슴 속에 있는 박정희를 누가 지울 수 있겠는가.

우리 역사에 광개토왕, 세종과 이순신 같은 영웅이 있음에도 왜 대한민국에는 영웅이 없는가.

 

 로마는 ‘가짜 영웅’을 만들면서 민족의 역사와 자존심을 세웠는데

영웅을 영웅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능력부재’다.

이 시대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자성을 촉구한다."- 박효종, 카톨릭대학교 신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민윤리교육학 석사와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국민윤리교육과 부교수와 사회과학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제42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저작상(사회과학분야)을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민윤리교육과 교수와 한국체계과학회 회장, 동북아학회 편집위원장,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위원,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 한국국민윤리학회 회장,

 교과서 포럼 상임대표로 있다ㅣ2006년 3월 29일 한국선진화포럼이 주최한

 

진보-보수 열린 대토론회에서 주장한 내용과 2009년 11월 12일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박효종 교수(서울대 윤리교육학과) 초청 ‘박정희,

왜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하나’ 제하의 조찬강연회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심상근, 미 버클리대 공학박사이자 칼럼니스트

"한국에서 경제적으로 검증된 박정희 모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시행착오 등을 거치며

 한참 방황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박정희가 세운 그 모델이 있어서

그냥 직행으로 오늘까지 달려온 것이다. 중국 측에서는 박정희를 은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중국을 일으키기 위하여 채택한 모델이 박정희 식 경제부흥이다.

 조용히 채택한 것이 아니고, 방송 및 행정지도를 통하여

 일년이 넘게 대대적인 대국민 홍보를 했다 :

 

 “박정희 식이 중국이 살길이다!” 박정희 시절, 주부들, 어머니들은

그다지 박정희 독재에 반대를 안 했다. 독재할래 가난할래 하면

남자들은 가난할래 하는 경우가 많을 수 있지만 주부들과

어머니들은 가난보다는 독재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 심상근, 미 버클리대 공학박사이자

칼럼니스트ㅣ2011년 12월 12일자 브레이크뉴스 사설의 내용 중

 

마틴 유든, 영국 대사

"한국은 정치·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78년 당시 한국은 경찰국가로 불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다. 정치범으로 분류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민주화를 이룩했다. 경제적 발전은 눈부시다. 한국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 그에겐 가고 싶은 길과 달성하기 위한 비전·

계획이 있었다. 선명한 리더십이다. 선명한 리더십에 교육열, 사회적 동질성이 함께 작용하며

 

한국은 내부적으로 혁명 같은 급변 없이 경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민주주의의 결핍을 잊어선 안 되겠지만

박 전 대통령의 리더십은 비슷한 시기 동남아 국가들에서와는 전혀 다른 대목이다.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당시 대통령은 경제발전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북한을 봐도 그렇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같은 사람들이다.

한민족이 동일하다면 북한은 왜 실패했겠나. 답은 리더십이다."- 마틴 유든, 런던대학교 법학 학사를 받은 이후 영국 대사로 활동하며 이등 서기관(1978년 9월∼81년 12월)과 정치 참사관(94년

 7월∼97년 7월)에 이어 대사로(2008년 2월 이후) 세 차례나 서울에서 근무했다. 모두 10년

 3개월을 한국에서 살았다ㅣ2011년 10월 2일 중앙선데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폴 허치크로프트, 호주국립대학교 정치학 교수

"한국에 박정희 대신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에드랄린 마르코스가 집권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마르코스는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의 그늘에서 개인적 치부에 안주했을 것이다.

한국은 동아시아의 이류 국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폴 허치크로프트, 예일대학교에서 동남아시아에 대해 공부를 해 문학 석사,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캠퍼스에서 15년을 공부했다. 이후에 호주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교수로 있다. 필리핀과 태국 정치를 연구하는 정치학자이다

2009년 10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김학준, 동아일보 전 회장

"장사하는 사람을 제일 낮춰 본 사농공상의 시대에 상업국가론은 혁명이었다.

초정 박제가의 ‘상업국가론’이며 이를 꽃 피워 국가발전의 틀을 닦은 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농업국가로부터 상업국가, 즉 무역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뤄

대한민국을 흥융하게 했다."- 김학준,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와

켄트주립대학교대학원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피츠버그대학교대학원 정치학 박사를 받았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및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연구조교수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 동경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객원교수,

 

독일 홈볼트재단초청 뮌헨대학교 동유럽연구소 객원연구원, 단국대학교대학원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정치학회회장, 명지대학교 법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세계정치학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했다ㅣ2008년 9월 1일 건국 60주년을 기념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건국 60년, 60일 연속강연’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구평회, E1 명예회장으로 제22대와 제23대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지냈다

 

"나는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통령을 꼽으라면 박정희 대통령을 꼽겠다.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 전 대통령은 국가관리가 철저했고,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을 빈곤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경제재건을 외쳤고,

 

부작용이 있지만 여론을 수렴해 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해

독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덕목은

국민들이 정부에 대해 '국민을 위해 잘 해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최고의 정치를 한 것이다."- 구평회,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를 받았고 호남정유 부사장,

럭키유전개발 사장, 호남탱커 사장, 호남정유 사장, 럭키긍성그룹 부회장, 호남정유 부회장,

 

한미협회 부회장, 한무개발 사장, 럭키금성상사 회장, 제22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제23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한미협회 회장, LG칼텍스가스 명예회장을 지냈다. 제8회 한미우호상을

 받았으며, 현재 E1 명예회장으로 있다ㅣ2002년 10월호에 실린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의 내용 중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자 제10대 한일경제협회 회장

"(절대)금액은 지금이 과거보다 크지만 돈의 가치, 사업의 가치를 느끼고 나라를 만들어가는

긍지를 느낀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 기업하기에 차라리 좋았다.

여야 및 정부도 서로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갈팡질팡 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 소득 100달러일 때 1000달러를 목표로 계획을

 세우고 또 다시 1만 달러를 비전으로 내세웠듯이

앞으로 정부와 정치권은 50년을 내다보는 미래 비전과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조석래, 와세다대학교 학사 및 일리노이공과대학 화학공학

석사와 공학 명예박사를 받았고 동양나이론 상임 감사와 상무이사, 전무이사와

 

동양나이론 대표이사 사장, 동양폴리에스터 대표이사 사장, 효성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한국엔지니어클럽 화공분과 회원, 효성물산 대표이사 사장, 한-덴마크경협위원회회장,

 

대한배구협회 회장, 효성중공업 회장, 한-스페인협회 회장,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한미경제협회

 부회장, 제26회 PBEC 서울총회 조직위원장, 한중경제협회 부회장,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한일포럼 운영위원, APEC PBF(Pacific Business Forum) 한국대표, 한강포럼 회장,

연세대 국제대학원 지역학분야 특임초빙교수, 한국종합기술금융 등기 이사,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국위원장과 부회장, 국제회장, 명예회장,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제9대 한일경제협회

회장,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이사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지냈으며 수출유공 대통령 표창,

 

석탄산업훈장, 동탑산업훈장, 공장새마을운동 대통령표창, 덴마크 다네브로그 훈장, 체육포장,

금탄산업훈장, 한국의 경영자상, 미국 일리노이공과대학 올해의 자랑스런동문상, 청소년 대훈장,

 

 미국 일리노이공과대학 우수동문상과 국제지도자상, 일본 욱일대수장, 매경이코노미 선정

올해의 CEO를 수상했다. 현재 효성그룹 회장, 동양학원 이사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일21세기위원회 위원, 제10대 한일경제협회 회장으로 있다ㅣ2007년 3월 29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취임 후에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의 내용과

 2007년 4월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의 내용과

2007년 7월 28일 개막한 '전경련 제주하계포럼' 개막식에서 개회사로 했던 말의 내용 중

 

                     김충남, 하와이 동서문제연구소 포스코펠로십 조정관

"박정희 대통령은 아주 적극적인 동시에 관리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성과를 이룩했다.

 

박정희식 국가경영이 왜 성공했는가? 박 대통령은 실천 가능한 목표를 내세웠다.

 예를 들면 공장을 세운다, 비료를 증산한다, 아주 뚜렷한 실천 가능한 목표를 세워서

그것을 달성했다. 그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국정운영시스템을 만들었다.

 

청와대 참모제도 그 때 처음 만들었다. 그 다음에 싸우면서 건설하자며,

경제기획원과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강력한 중앙통제시스템을 만들었다.

 

이것이 독재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여건에서는 국가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이런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치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결국 국가 지도자는 국가 건설을 위해 우선순위를 결정할 수 밖에 없다. 관리방법은 뭐냐?

군대식 관리방법이다. 군대식 관리방법은 미국식 관리방법이다. 인사에 있어서는 전문성이나

능력, 경험을 중요시했다. 그리고 중요한 사람은 장기간 재임했다.

 

남덕우 총리는 재무장관·경제기획원 장관을 10년 동안 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재무장관·상공장관·차관·비서실장을 9년 동안 했다. 최연소 과기부 장관·원자력

연구원장 외에도 장관을 7년 7개월이나 했다.

 

박태준 총리가 포철에 계속 근무했기 때문에 현재의 포철이 있게 된 것이지,

요즘처럼 2∼3년 만에 바꾸면 절대 포철이 될 수 없었다.

 

국가발전 차원에서 장기적 관점으로 정책을 세우고, 일관성 있게 추진했고,

또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한 의지를 보여줬다." - 김충남,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를 지냈고, 청와대에서 사정비서관, 정무비서관,

공보비서관으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세 분의 대통령을 9년여에 걸쳐 보좌했다.

 

 미국 RAND 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정책센터의 자문위원을 10여 년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자문경력이 있으며,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서

10여 년간 연구위원으로 있었고 최근에는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었다

 

2006년 3월 29일 제516회 수요간담회에서 ‘대통령과 국가경영 -

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를 주제로 했던 강연의 내용 중

 

함재봉, 랜드연구소 선임정치학자를 지냈고 현재는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할은 '정치적 민감성'과 '민족에 대한 비전'을 갖고 국가를 혼란으로부터

 구해낸 정치 지도자였다.

박정희는 정치적 효능, 관료제와 경제적 효율성을 가장 우선시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현대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국민 형성의 사례로 한국이 꼽힌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치적 민감성과 민족에 대한 비전을 갖고 국가를 혼란으로부터

 구해내는 역할을 한 정치지도자의 존재였다. 국가형성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 유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스럽고 모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시 정권이 권위주의적이었고 독재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국민 형성은 성공적이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나 홉스, 푸코가 말했던 근대 권력의 억압성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이었다는 정치적 규칙을 현대 한국의 맥락에서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수행 한 것이었다."

- 함재봉, 칼튼대학 경제학 학사와 존스홉킨스대학교대학원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듀크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조지타운대학교 교환교수와

 유네스코 사회과학국 국장,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한국학연구소 소장과

 

국제관계학부 및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고 랜드연구소 선임정치학자를 지냈다.

현재는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2009년 10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박명림, 연세대학교 대학원 교수

"1950년대 북한이 앞서있던 상황에서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시점에는 완전히 역전 되었다.

이런 차이는 국내, 남북관계, 국제전략의 세 가지에서 차이가 난다.

국내적으로는 권위주의체제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이견과 반대의 존재 유무에서

 결정적으로 갈렸으며,

남북관계에서도 박정희는 분단과 남북경쟁의 긍정성을 부정성보다 키우는데 성공했다." - 박명림,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연구교수, 북한실장과 미국 하버드대학교 하버드옌칭연구소

 

합동연구학자와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연세대학교대학원

 학과간협동과정 지역학 교수를 지냈다

2009년 10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김동노,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박 전 대통령이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통제전략 덕분이었다.

박정희는 민족주의적 이념 조작과 새마을 운동을 통한 전통적 통제질서의 복원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민족의 일원이라는 점을 앞세웠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게 교육해 국가의 강압적인 측면을 감추었다.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보면 상당히 평등지향적인 것들이 있다.

 

흔히 박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에만 관심을 쏟은 지도자라고 평가되지만,

당시 정책 가운데 국가사회주의적인 요소들이 꽤 있었다.

 예컨대 의료보험 정책에서 시장지향적이 아닌 국가주도적 체제를 도입했으며,

 

교육분야에서 중·고등학교 평준화를 시행한 것은 대표적인 국가사회주의적인 시도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이 같은 정책을 시도했다면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컸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힘으로 밀어붙였다."- 김동노,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와 시카고대학교대학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교수와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

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김한종,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박정희 정권이 정신교육과 전통정신을 내세우며 한국의 가부장적 사고를 미화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국민 정신에 관한 부분을 통해

국가적 교육을 어떻게 이끌려고 했는지 등을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 김한종,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역사교육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다ㅣ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신율,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문구가 우리 국민에게 자신감을 줬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 때문에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가 생긴 측면도 있다.

민주주의는 과정이 중심인데도, 결과 위주의 정치·사회 문화가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당시 근대화 과정에서 개발독재가 불가피했던 점은 인정해야 한다" - 신율,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및 프라이부르크대학교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통일연구원

연구위원과 통일부 주요정책자체평가 심의위원과 한국국제정치학회 섭외이사와 이사,

 

통일부 정책자문위원과 한국정치학회 섭외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다ㅣ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윤성이,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산업화를 박 전 대통령의 ‘공’으로, 민주화 지체를 ‘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는 경계해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각각 ‘공’과 ‘과’가 있다. 산업화를 이루며 경제성장을 한 것은 ‘공’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인권 탄압, 정경유착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빠른 성장을 하기 위해

사회적 규범과 절차가 무시된 것도 지금까지 계속 영향을 주는 문제다.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독재정권을 이끈 것은 ‘과’가 되지만,

 

 ‘경제성장 없이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정치학적 시각에서 보면 중산층을 만들어낸 것을 비롯해 ‘공’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윤성이,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오하이오주립대학교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전산원 전문연구원과 경상대학교 정치행정학부 조교수와

 

부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다

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정희식 ‘강한 국가’의 복원이 필요하다.

박정희 시대는 ‘강한 국가’와 ‘강한 사회’가 짝을 이루면서 전략과 실행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그에 따른 시너지를 극대화한 경우였다.

박정희 시대의 성취에는 국가의 능력뿐 아니라 국가의 전략을 수용하고 실행하면서도

일방적 독주는 견제했던 강한 사회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는 약해진 반면 사회는 여전히 강한 상태가 유지돼 문제가 생기고 있다

. 따라서 강한 사회를 뒷받침할 강한 국가가 필요하다. ‘박정희 독재’가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동의했기 때문이며 동의를 얻어내는 데에는 도덕성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의 리더십은 ‘잘 살기 위해 부정부패 안 하고 열심히 할테니,

국민도 잘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전반적으로 국가와 기업의 유착도 있었지만,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측면에서 동의를 얻었던 것이다."- 류석춘, 연세대학교 사회학 학사 및

일리노이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와

 

 한국사회학회 총무 운영위원, 한국동남아학회 총무이사,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회학전공

 주임교수,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주임교수, 연세대학교 사이버교육지원센터 소장,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학과장을 지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교수와 한국동남아연구소 이사로 있다ㅣ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김병국,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정희 시대의 공과는 국내에서 여전히 논란거리다.

하지만 역사는 무 자르듯 공과 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약탈국가대 주권국가, 주권대 종속,

보수대 진보의 이분법으로 보면 놓치는 게 많다.

이번에 출판된 책은 박정희 시대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잣대를 제시하고자 했다. 거시지표로 보면 평균 성장률 8.5%의 고도성장시대였다.

하지만 경제 성장만 놓고 보더라도 폭과 깊이가 널뛰기했던 불확실하고 아슬아슬한 시기였다.

 

13%를 성장한 시기가 있지만 저성장에 이어 마이너스 성장으로 추락한 시기도 있었다.

외환보유액이 언제든지 바닥날 수 있는 불안한 나라였다. 8.5% 성장률 속엔

수많은 고민과 긴장과 갈등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엄청난 리스크 테이크를 하는 모험가였다.

 

보통사람이라면 택하지 않을, 또 택하지 못할 리스크를 계속 선택해 나갔다.

박정희의 전략은 3H로 설명할 수 있다. 고위험, 고성장, 고비용(High risk, High payoff,

 High cost)이다. 민간부문과 기업을 확장시켰지만 시장방식이 아니었다.

 

1965년엔 정기예금 금리를 하룻밤 새 연 15%에서 연 30%로 올려 은행으로 돈을 끌어 모았지만

 대출 이자율은 그보다 낮춰 투자 위축을 막았다. 역금리제다.

또 사채시장을 혼수상태에 몰아넣은 1972년의 8·3 사채 동결조치도 마찬가지다.

 

재정으로 기업을 지원하고 채무를 완화시켰다.

그런데 그런 돈이 기업 투자로 이어질 것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었겠나.

대박 가능성이 높지 않았는데 대박 나게 만들었고, 그러기 위해 많은 비용과 희생이 따랐다.

 

 박정희는 그런 길을 갔다.

박 전 대통령이 그런 길을 가게 된 원인은 당시 한국은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커다란 무역적자를 메우려면 수출이 신장돼야 했는데 수출을 늘리기 위한

기술과 자원이 부족했다. 고학력자의 높은 실업률은 정치·사회 불안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런 어려운 길을 가던 한국이 어느 날 갑자기 길을 바꿨다.

그것은 기존 이론처럼 개발국가론의 관료제로 설명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리더십을 연구해야 문제가 풀린다. 막차인지 여부는 박정희도 몰랐을 것이다.

다만 잘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두 자릿수 고속 성장으로 달려 나간 중국을 생각해 보자.

그때 기회를 놓쳤다면 한국의 산업화는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 김병국,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특히 개발국가론에 따라 박정희

시대를 연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과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회 위원, 한국정치경제학회 연구이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부교수와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학부장을 지냈으며, 동아시아연구원

원장과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소장,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현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제9대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2011년 3월 18일에 4월 1일 미국 하버드대에서 발간하는 '박정희 시대

(The Park Chung Hee Era)'란 논문집을 출판한 것에 대해 

중앙선데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황병태, 대구한의대학교 총장이자 당시 경제기획원 경제협력 국장

"내가 중국에서 인기가 있는 비결은

 아마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경험한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노하우를

아주 성심성의껏 중국측에 전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국은 한국경제의 성공 배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장쩌민 주석 등 고위관계자들이 주중대사 시절

나만 보면 장관들 토론회나 전인대회에서 한국 경제개발의 노하우를 얘기해 달라고 했다."

- 황병태,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와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교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기획원 경제협력 국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 통일민주당부총재, 국회의원, 제4대 경산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현재 대구한의대학교 총장으로 있다2002년 8월 22일에 영남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이효수, 영남대학교 총장이자 노동경제학자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산업 발전단계를 이행한 점이 결정적 역할로 평가받고 있다." - 이효수, 영남대학교 경제학 학사를 받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노동경제학자로 영남대학교 상경대학 경제금융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환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교 객원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객원교수, 제3대 영남대학교 대학발전협의회 의장,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객원교수,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학과장, 경상북도 중소기업 지원센터 이사, 영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한국노동경제학회 부회장, 한국경제학회 이사, 제4회 국제노사관계학회 국제자문위원,

 

 영남대학교 상경대학 학장, 제5회 국제노사관계학회 프로그램위원회 위원장, 노동부 정책자문

위원, 제17대 한국노사관계학회 회장, 국제노사관계학회(IIRA) 집행이사,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대구MBC 시청자위원회 위원장, 경북테크노파크 공동이사장, 대구경영자총협회 고문,

 제13대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부회장, 사회통합위원회 지역협의회 위원을 지냈으며,

 

제38회 경상북도 문화상 인문사회과학부문, 신노사문화대상 노사화합공로상, 녹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현재 영남대학교 총장으로 있다ㅣ2011년 11월 22일 구미시가 주최하고

영남대 박정희리더십연구원 주관으로 열린

'국가지도자 리더십과 국가발전'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했던 말의 내용

 

좌승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겸임교수

"경제민주화와 균형성장 정책이 오히려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앗아갔다.

여러분이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청산 대상인 박정희 패러다임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고

 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박정희는 전 세계 경제대통령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의 특징을 볼 때 성과 내는 기업-마을만 지원했으며,

흥하는 자를 우대하고 집중과 집적이란 전략으로 경제발전을 이끌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은 전 세계 경제학자들이 와서 보도록 지어야한다." - 좌승희,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고 UCLA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연방준비은행 미니애폴리스 이코노미스트,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KDI

선임연구위원, 대통령자문 정부혁신추진위원회 위원,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한국비교경제학회

 

회장,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한국제도, 경제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재정경제원 장관 업무유공자 표창, 제26회 매경 이코노미스트상, 전국경제인연합회 2006 시장경제대상 출판물부문 우수상, 제25회 정긴기언론문화상 경제경영도서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현재 경기개발연구원 원장과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겸임교수로 있다

2004년 5월 29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을 위한 3차 워크숍에 강연자로 초빙되어

 그 자리에서 했던 말의 내용과 2010년 2월 17일 명동은행연합회관에서

'박대통령기념관 바르게 짓기 운동본부'에서 주최한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올바른 건립을 위한 시민 공청회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윤종용,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 교수

"박 대통령이 독재자라지만 당시에 열심히 엔진을 돌려놓았기 때문에

엔진이 꺼진 지금도 관성에 따라 우리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며,

 

지난 40여년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배 이상 늘어났는데

 이런 수치를 두고 어떻게 박 대통령 시대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나?

또한 박 대통령은 어느 정도 규모의 공장이면 준공식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기업활동과 경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여타 대통령들과 다르다. 

 

산업화의 기틀이 된 새마을운동을 '정치적 목적이 있다'며

이후 정권에서 없애버린 것도 개인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 윤종용,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학사 및 매사추세츠공과대학대학원을 나왔다. 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이사 사장,

 

한국공학한림원 이사장,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회장,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초빙교수,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삼성전자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현재 국제전기전자기술자협회 명예회원, 새만금개발사업 명예자문관

, 제1대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장,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 교수로 있다

2007년 6월 5일 영남대에서 가진 '기술혁신과 경영'을 주

제로 한 특강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는 어렵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일어난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은

영국을 '선구적인 예'로 하는 일반적 경험에서 보아 크게 일탈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울러 실존하지도 않았던 영국 모델을 근거로 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론을 가지고

 

박정희 시대를 비판하는 일도 이제는 그쳐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가치선택은 발전이었고

그 선택은 현실성이 있었다. 발전이란 가치를 옹호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민주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경험적 근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인데,

 

민주라는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만약 굶주림이나 절대빈곤과

 배타적 선택관계에 있다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할 사람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빵의 문제는 민주라는 가치를

 의미 있게 만드는 전제이다. 전자 없는 후자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보다는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 있다고 본다.

 이러한 가치선택에 입각할 경우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하에서 일어난 경제발전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수반된 많은 희생은 가치선택의 결단에 부수되는 불가피한 손실로 여겨지게 된다.

 

이런 식의 평가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다른 가치판단에 입각할 경우

그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판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우선 만약 우리가 발전이나 산업화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희생과 부작용도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산업화 과정의 불가피한 희생의 측면을 고려했다고 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여러 비판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산업화가 호오의 가치판단을 떠난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과정이라는 점과

 

그러한 운명적 과정을 떠맡아 추진한 박정희 정권에게 그 시대의 모든 문제를 귀속시키는

 오류를 범하지는 말자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요지이다.

맑스와 베버에게 산업화 과정이 긍정과 부정 그리고 희망과 절망의 이중적 과정으로 보였듯이

우리에게 박정희 시대는 발전과 혁명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발전이 퇴행을 낳았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다시 발전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대한국정치외교사와 국제정치경제론,

법정치학을 다룬다.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초빙교수, 일본 규수대학 법학부 객원교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한국미래학회 회원, 한국산업사회학회 회원, 국제정치논총 편집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전문위원,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회과학연구소 소장과.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지냈다. 그는 소통하는 보수로서 보수적 성향에 서서

 진보진영의 논리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보수와 진보간 논쟁과 소통을 주도해온 지식인이다ㅣ그의 책 <건국과 부국>의 내용 중

 

오명, KAIST 이사장

"이 책은 우리의 눈부신 산업발전과 경제개발의 원동력이 된 과학기술 입국의 첫 단추를 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과 그 속살을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재조명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 과학기술정책의 밑그림을 짠 '과학대통령'의 고뇌와

노력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하다." - 오명, 서울대학교 전자공학 학사 및 뉴욕주립

대학교스토니브룩교대학원 전자공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순시온국립대학교 명예박사를

받았다. 아주대학교 총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대통령 경제비서관, 각 장관을 두루 역임했으며, 동아일보 대표이사 회장과 미래포럼 공동대표,

 제7대 사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 제6대 과학기술부 장관, 제17대 건국대학교 총장,

 

KT 사외이사, 동부하이텍 사외이사, 국가미래정책포럼 이사장, 제7대 한국대학총장협회 회장,

 2008과 2009 산학협력EXPO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과 에쓰오일 과학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청조근정훈장, 금탑산업훈장, 황조근정훈장,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한국학회

 

세계적 한국대상, 제2회 한국공학기술상, 제6회 산업기술부문 윤경상, 올해의 육사인상,

 세계박람회기구 골드메달, 코멘다도르 훈장, 대십자훈장을 받았으며, 현재 웅진그룹 고문과

웅진그룹 태양광에너지사업 부문 회장, KAIST 이사장, 웅진폴리실리콘 회장으로 있다

박정희와 관련된 책 <과학 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의 출판사 서평의 내용

 

강태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으로 경제성장, 산림녹화, 농촌개발, 자주국방을 언급하지만

이 모든 성장의 원동력은 그가 주도한 과학기술의 진흥에 있다.

 

 탈(脫) 이공계 현상이 사그라지지 않는 작금, 10~20년을 내다본 선투자를 통해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한 리더십에 대한 재조명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강태진, 서울대학교

섬유공학 학사 및 동 대학원 섬유공학 석사와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대학원

 

섬유고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재료공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최고산업전략과정(AIP) 주임교수, 한국섬유공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으로 있다ㅣ박정희와 관련된 책

 <과학 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의 출판사 서평의 내용 중

 

박방주, 한국과학기자협회 회장 및 중앙일보 과학전문기자 

"한국의 과학기술발전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그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본 적이 없었다.

그와 호흡하며 한 시대를 같이 했던 과학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그래서 호소력을 더욱 높인다"

 - 박방주, 경희대학교 전자공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전자공학과 석사, 전파공학과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일했다. 중앙일보에서 20년 동안 과학기술과

 

 정보통신 담당 기자로 활동하며 취재 현장을 해서 중앙일보 과학전문기자로 통한다.

한국과학저술인협회 올해의 언론상에 선정되기도 했고,

한국과학기자협회 회장으로 있다박정희와 관련된 책

<과학 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의 출판사 서평의 내용 중

 

전병관, 한국체육학회 회장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은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원천이었던

과학기술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 분야 업적을 집중조명한 데 대해 이 책의 모든 저자들에게

큰 박수와 함께 깊은 감사를 보낸다." - 전병관, 한양대학교대학원 체육학 박사를 받았고

 현재 경희대학교 체육대학 체육학부 스포츠지도학전공 교수와 (사)한국올림픽성화회 부회장,

한국체육학회 회장으로 있다

      박정희와 관련된 책 <과학 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의 출판사 서평의 내용 중 

 

김엽, 서희건설 부회장

"나는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한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철학은 지난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미래지향의 가치로 승화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 틀림없다.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이 민주화 열망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통치사상은 세계 여러 개발도상국가의 모범이 되고 있다.

세계 사상사에 박정희 통치철학을 정립할 시기가 됐다." - 김엽,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일반행정전공 석사과정 중퇴로 CU그룹 부회장, CU건설 대표이사, 서희건설 사장과 부사장,

 한국마사회 자문위원, 대한민국국회 입법정책연구회 사무총장, 국민산업학교 총학생회 회장,

영주시 교통장애인후원회 회장, 박정희육영수연구원 자문위원, 국민대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대구경북 독도참살아본부 공동대표, 국회입법정책연구회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서희건설 부회장 및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공동대표로 있다ㅣ2011년 5월 14일 5.16 50주년을 맞아

우리 고장 소수서원에서 열린 '박정희 통치철학 국제포럼' 폐회사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최외출, 영남대학교 교수로 박정희 리더십연구원장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은 나라를 막론하고 국가흥망을 좌우한다. 절대빈곤을 극복하고

실의에 찬 국민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해 희망을 준

박정희 대통령과 중국 등소평 지도자의 철학을 배워 국가발전에 매진해야 한다.

반세기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한국의 성공은 지구촌 많은 국가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으나,

정작 우리는 그 과정을 살펴보는 인식이 미흡하다. 새마을운동을 도입했거나

 배우려는 나라가 129개국이나 된다.

지구촌이 함께 잘사는 ‘더 큰 새마을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지면 좋겠다." -

 최외출, 영남대학고 정치행정대학 지역및복지행정학과를 졸업했고 대구대학교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남대 박정희 리더십연구원장, 영남대학교 교수와 대외협력부총장

 

, 원장으로 있다ㅣ2011년 11월 22일 구미시가 주최하고 영남대 박정희리더십연구원 주관으로

열린 '국가지도자 리더십과 국가발전'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했던 말의 내용과

 2012년 4월 23일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전상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

"세계 10위권의 경제부국이 된 것은 박정희 시대의 공적으로 명확히 평가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경우 산업화 혹은 경제발전이었다.

 이에 비해 민주화는 국가목표라기보다 국민적 염원이었다.

1960년대부터 부국을 위한 일련의 공공계획이 시동됐다. 가시적으로 실천된 것은

 1962년부터 1997년까지 일곱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대한민국 60년사에서 국가주도 공공계획이 35년 동안 있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5개년 계획이 용도폐기 되자마자

IMF 경제위기가 발생했다는 점, 유의해봐야 한다."- 전상인,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및

 동 대학원을 나왔으며, 브라운대학교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와 부교수, 교수, 사회조사연구소 소장과

 

사회교육원 원장과 기획처 부처장을 지냈으며, 미국 워싱턴주립대학교 사회학과 방문교수를

지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부교수이자 정교수,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

한국비교사학회 부회장, 한국미래학회 회장으로 있다

2011년 5월 16일 5.16 50주년을 맞아 열린 ‘박정희 통치철학

국제포럼' 토론회에서 주장한 내용과 2010년 1월 4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박정동, 인천대학교 무역학과 교수

"한국사회에서는 박정희식 경제성장 모델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있지만

1960~70년대 경제개발 모델은 굉장히 유익하다. 개발모델링을 완료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세련된 모델을 만들어 궁극적으로

 

‘박정희 스쿨’(가칭)을 만드는 게 꿈이다. 후진국의 지도자를 불러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체계적으로 전달하고 교육하고 싶다. 미국의 케네디스쿨처럼 왜 안 되나.

국에서는 이 자산 가치에 코웃음을 치지만 소중한 자산이다.

 

세계 최극빈국 중 하나인 아프간에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군·관·민으로 구성된 재건팀을 수도 카불과 인접한 파르완주에 파견해 놓고 있다.

재건계획의 핵심은 농촌 개발, 인적자원 개발, 도시경제 개발의 3개 축을 중심으로

 당근과 채찍이라는 인센티브제도를 활용하는 것이다. 다리 하나를 짓더라도

 

 현지 주민들이 소액이나마 돈을 내도록 해 참여의식을 높이고 보상성과가

주민들에게 돌아가도록 한다. 일부에서

 

 1960~70년대 박정희 식의 경제개발 모델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빈곤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제3세계에선 성공한 경제발전 모델로서

 

 한국을 최고로 인정한다. 전후 한국은 어떻게 빈곤퇴치에 성공했으며,

 정부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새마을운동으로 대표되는 농촌개발정책을 어떻게 운영했는지 등

정책의 입안과 실행까지 한국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 열성이다. 또 중소기업 육성,

 

구체적인 수출진흥책,세금징수를 포함한 자원축적 방법 등 아주 구체적인 정책의 입안에서

 실행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경험을 배우느라 열성이다. 부지런하고 자존심이 강한

 아프간 사람들의 심성과 국제사회의 공조, 그리고 한국의 개발경험이 잘 조화를 이루게 될 때

아프간도 힘찬 비상의 날개를 펴지 않을까 기대한다.

본토에서 홀대받는 박정희식 개발모델이 머나먼 이국에서 평가받고 있는 게 묘하다.

"- 박정동,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베이징대학 경제학과 경제관리계 연구원과 하버드대학 동아시아 연구센터에 교환교수를

 

지낸 뒤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대통령자문

동북아경제중심 추진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인천대학교 무역학과 교수와

 

아프칸 PRT 자문단장으로 있다ㅣ2002년 10월 20일 국민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과 2011년

 5월 11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의 내용, 2011년 7월 2일 중앙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이재석,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제2차 세계대전 후 출현한 신생 독립국가들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공통적으로 건국, 산업화,

 민주화였고,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는 그와 같은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유일한 나라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산업화는 우리나라가 주변국가에서 중심국가로 진입하게 된 수준이다.

그에 대한 추동력 가운데 하나는 5·16군사정변의 주역인 박정희의 근대화 노선에서 찾을 수 있다."

 

- 이재석, 경북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천대에 부임한 이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 대한정치학회 이사,

 

동아시아포럼 공동의장, 인천대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으로 있다ㅣ2011년 5월 13일 5.16 50주년을

맞아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주최한 '5.16 군사정부의 정책 구상과

실제'라는 주제의 학술행사에서 발표했던 내용 중

 

함재봉, 랜드연구소 선임정치학자를 지냈고 현재는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할은 '정치적 민감성'과 '민족에 대한 비전'을 갖고

국가를 혼란으로부터 구해낸 정치 지도자였다.

박정희는 정치적 효능, 관료제와 경제적 효율성을 가장 우선시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현대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국민 형성의 사례로 한국이 꼽힌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치적 민감성과 민족에 대한 비전을 갖고

국가를 혼란으로부터 구해내는 역할을 한 정치지도자의 존재였다.

 

국가형성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 유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스럽고

모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시 정권이 권위주의적이었고

독재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국민 형성은 성공적이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나 홉스, 푸코가 말했던

근대 권력의 억압성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이었다는

정치적 규칙을 현대 한국의 맥락에서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수행 한 것이었다." - 함재봉, 칼튼대학 경제학 학사와 존스홉킨스대학교대학원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듀크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조지타운대학교 교환교수와 유네스코 사회과학국

 

국장,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한국학연구소 소장과 국제관계학부 및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고 랜드연구소 선임정치학자를 지냈다. 현재는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2009년 10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박명림, 연세대학교 대학원 교수

"1950년대 북한이 앞서있던 상황에서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시점에는 완전히 역전 되었다.

 

이런 차이는 국내, 남북관계, 국제전략의 세 가지에서 차이가 난다.

국내적으로는 권위주의체제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이견과 반대의 존재 유무에서 결정적으로 갈렸으며,

남북관계에서도 박정희는 분단과 남북경쟁의 긍정성을 부정성보다 키우는데 성공했다."

- 박명림,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연구교수, 북한실장과 미국 하버드대학교

 

하버드옌칭연구소 합동연구학자와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연세대학교대학원

학과간협동과정 지역학 교수를 지냈다

2009년 10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김동노,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박 전 대통령이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통제전략 덕분이었다.

 박정희는 민족주의적 이념 조작과 새마을 운동을 통한 전통적 통제질서의 복원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민족의 일원이라는 점을 앞세웠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게 교육해 국가의 강압적인 측면을 감추었다.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보면 상당히 평등지향적인 것들이 있다.

흔히 박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에만 관심을 쏟은 지도자라고 평가되지만,

당시 정책 가운데 국가사회주의적인 요소들이 꽤 있었다.

 예컨대 의료보험 정책에서 시장지향적이 아닌 국가주도적 체제를 도입했으며,

 교육분야에서 중·고등학교 평준화를 시행한 것은 대표적인 국가사회주의적인 시도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이 같은 정책을 시도했다면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컸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힘으로 밀어붙였다."- 김동노,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와 시카고대학교대학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교수와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

ㅣ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김한종,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박정희 정권이 정신교육과 전통정신을 내세우며 한국의 가부장적 사고를 미화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국민 정신에 관한 부분을 통해

국가적 교육을 어떻게 이끌려고 했는지 등을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 김한종,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역사교육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다

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서거 30주년을 맞아 연세대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에서 열린 '박정희와 그의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이재석,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제2차 세계대전 후 출현한 신생 독립국가들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공통적으로 건국, 산업화,

 민주화였고,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는 그와 같은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유일한 나라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산업화는 우리나라가 주변국가에서 중심국가로 진입하게 된 수준이다.

그에 대한 추동력 가운데 하나는 5·16군사정변의 주역인 박정희의 근대화 노선에서 찾을 수 있다." - 이재석, 경북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천대에 부임한 이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

대한정치학회 이사, 동아시아포럼 공동의장, 인천대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으로 있다ㅣ2011년 5월 13일

 5.16 50주년을 맞아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주최한

 '5.16 군사정부의 정책 구상과 실제'라는 주제의 학술행사에서 발표했던 내용 중 

나는 박정희대통령을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있으며 존경한다

그래서 1960년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패러다임으로 생각해본 결과

"우리나라 인물 중에 위인을 꼽는다면 꼭 세 분이 있다.

한 분은 세종대왕, 한 분은 이순신 장군, 그리고 또 한 분은 박정희다.

박근혜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가 날이 갈수록 점입가경인데

인정할것은 인정하고  정치생명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흉탄에 하늘나라에 가신 어머니  육영수여사님과  

아버지 박정희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거듭나야만 한다. 

나는 아직 박근혜대통령을 굳게 믿는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한국의 거대한 제 1도약을 이루셨으니

21세기 한국의 제2 도약을 이루어서 4번째 한국의 영웅이 되시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