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딘

기독교의 십자군(Crusade)에 맞선 아랍의 영웅 살라딘(Saladin, Salah ad-Din, Salahuddin Al-Ayyubi. 1138~1193.3.4)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아랍어: صلاح الدين الأيوبي, 쿠르드어: سه‌لاحه ‌دينێ ئه ‌يووبى, 페르시아어: صلاح الدین ایوبی, 터키어: Selahaddin은
지금의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Tikrit)에서 태어났다.

티크리트는 현대에 있어서 아랍의 사담 후세인도 태어난 곳이며, 훗날 토굴에 숨어있다가 미군에게 잡힌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헤자즈 등지를 아우르는 아유브 왕조(Ayyubid dynasty)를 세웠으며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본명은 ; 유수프(Yousuf) 이다.

살라딘은 뛰어난 지도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무슬림과 기독교계 모두에 널리 알려졌으며,
십자군(Crusader)과 맞서 전쟁을 치를 당시에 보인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은 서방세계에까지 널리 전해져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았다.

대표적으로 단테의 신곡(神曲)에서 살라딘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과 함께 림보(Limbo)(지옥과 천국의 중간에 있다는 대기장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거나 몰랐던 善人이나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이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 머무르는 곳)에서
최소한의 벌을 받는 고결한 이교도로 등장한다.

살라흐 알 딘(Salah ad-Din)이라는 그의 이름은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을 의미한다.




살라딘 시대의& 중동

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족에서 태어난 살라딘은 다마스커스(Damascus)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 나짐 앗딘 아유브(Najm ad-Din Ayyub)는 발베크(Baalbek)의 영주였다.
다마스커스에 마무는 10년 동안 누르 앗 딘(Nur ad-Din)의 법원에서 수니(Sunni) 파의 교리를 배운 살라딘은
그의 삼촌인 누르 앗 딘의 부관에게서 기초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160년대 이집트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의 분파와의 전투끝에 승리하여 1169년 삼촌을 장관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였다.

아말릭 1세(Amalric I)가 통치하는 예루살렘 왕국(Latin Kingdom of Jerusalem)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
살라딘은 이집트 왕가의 혼란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다.

시리아의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살라딘은 이름뿐인 칼리프 알 아디드(Al-Adid)가 죽자,
1171년 9월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살라딘은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살라딘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 딘과의 마찰을 피했다.
누르 앗 딘이 죽기 전까지 살라딘은 가급적 군사행동을 피했지만 이내 십자군과의 대대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셀주크(Seljuk)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아유브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에 수니파 교단을 회복하였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파티마 왕조 지지세력을 소탕하였으며 홍해를 건너 예멘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수니파 신도들은 그에게 신의 친구(Waliullah)라는 호칭을 붙였다.


1170년과 1172년 살라딘은 누르 앗 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살라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누르 앗 딘 사후 그의 직위는 아직 소년이었던 살리흐 이스마엘 알 말리크(Salih Ismail al-Malik)에게
계승되었지만 이 소년 역시 1181년 사망하였다.
누르 앗 딘 사후에 살라딘은 다마스커스로 행군하였으며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로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누르 앗 딘이 통치한 다른 두 대도시 알레포(Aleppo)와 모술(Mosul)은 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살라딘은 이 도시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였다. 살라딘은 1176년과 1186년 이들 도시에 대한 공성에 나섰지만
1176년 5월 22일 알레포 공성 당시 해시시를 먹는 자들(Hashshashins)이라는 정예 암살자 조직의 공격을 받고
공격을 철수하기도 하였다.


몽기사르 전투(Battle of Montgisard)

살라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십자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도 거듭 승리하였다.
단 한번, 1177년 11월 25일의 몽기사르 전투(Battle of Montgisard)에서 살라딘은 패배를 기록하였는데,
예루살렘의 볼드윈 4세(Baldwin IV)와 샤티옹의 레이널드(Raynald of Chatillon), 성당기사단(Knights Templar)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살라딘은 대패하여 병력의 9할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178년 살라딘은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살라딘은 패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며 군대를 재건하였고,
1179년 벌어진 십자군과의 전투(Battle of Jacob's Ford)에서 승리하였다.
십자군의 거듭된 반격은 살라딘을 자극하였고, 특히 샤티옹의 레이널드는 홍해 함대를 동원해서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계속적인 습격을 했다.
이어서 레이널드는 성지인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를 위협하였고,
살라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케라크(Kerak)의 레이널드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레이널드 또한
1185년 하지(Hajj)의 순례자들을 공격해 보복하였다.


하틴 전투(Battle of Hattin)

1187년 7월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다.
1187년7월4일 하틴 전투(Battle of Hattin)에서 기드 루시앙(Guy De Lusignan)트리폴리의 레이몬드 3세(Raymond III of Tripoli)
연합군과 대치한 살라딘은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으며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트리폴리의 레이몬드 3세(Raymond III of Tripoli)

샤티옹의 레이널드는 살라딘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는데, 유럽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는 레이널드가 상단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살라딘의 누이를 살해한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하지만 무슬림측의 기록에는 없는 부분이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누이가 없었으며, 그를 따르는 여자 무슬림이 있었다고 전할 뿐이다.
'기 드 루시앙'역시 사로잡혔지만 살라딘은 그의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기 드 루시앙(Guy De Lusignan)  - 'Kingdom of heaven'의 악당

전체를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십자군 전쟁에서 등장한 전설적인 인물은 두 사람으로 압축될수있다 유럽의 사자왕 리처드1세(1157~1199)와 이슬람세계의 영웅
술탄,살라딘(살라흐앗딘,1137~1193)이다 영국의 왕 리처드는 1190년 프랑스의 필립2세,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1세와 제휴해서
제3회 십자군을 편성, 직접 출정했다. 1191년 리처드는 성지 예루살렘 근처에서 살라딘 군대를 격파한후 3년간의 휴전을 맺어
사자왕(師子王)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동시에 잔혹성으로도 유명했다. 십자군 전쟁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이스라엘 북부 아크레 공방전에서 승리한 리처드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않은 결정을 내린다. 기독교인 포로들의 석방이나
교환에 이용될만한 소수의 귀족들을 제외한 모든 포로들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려서, 2,700명의 포로들을 참수해버린것이다
무슬림과 이슬람 율법을 유린한다는 종교적 광기도 담겨있었다

반면 살라딘은 리처드 1세와는 달리 이라크 북부에서 태어난 쿠르드족 출신인 살라딘은 그의 삼촌 시르쿠가 지휘하는
이집트 원정대에 참여해 유럽의 십자군 전쟁 원정대인 프랑크족을 몰아낸다 살라딘은 그 공적으로 시아파 파티마왕조의 대재상에


오른 그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집트의 지배자가 되어, 살라딘은 국가 공인종교를 수니파로 바꾸고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이루며.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 이라크 지역에 이르는 이슬람 제국을 형성한다. 이슬람 제국의 가장 큰 위협은 단연 십자군이었다.
평화 조약중, 예루살렘 인근을 지나는 대상과 순례객들을 공격하는 예루살렘 왕국의 기독교 군대에 대해 그는1187년 성전을 선포한다.
기독교 군과 이슬람 군의 최대 격전은 현재 이스라엘 북부 히틴에서 벌어졌다 이슬람 대군은 살라딘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전투에 임해 기독교군을 격파한다. 3만여명의 병사가 사망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예루살렘왕국의 왕도 결국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서방의 학자들도 살라딘을 영웅이자 최고의 지도자로 인정하는 부분은 여기서 부터 등장한다 관용과 용서의 정신이다 전투가 끝난 뒤
포로로 잡힌 예루살렘 왕에게 직접 물을 따라 주며 융숭한 대접을 했다. 그리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거점을 둔
기독교 왕국으로 그를 보내 주었다. 제1차 십지군 전쟁이후 90년 만에 기독교의 수중에 있던 성도를 되찾은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그의 첫명령은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정복"이었다. 포로를 처형하는 일이 없었다
기독교인 부상자들을 정성껏 돌봤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살라딘의 부하가 되기를 자청했다
남편을 찾아 달라는 여인과 함께 울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유럽의 일부학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정복자"라는 칭송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루살렘정복을 외치며 출정한 리처드1세와의 전투에서도 넓은 아량을 잊지 않았다
전투중에 리처드가 낙마했을때 새말을 보내주었고 부상을 당하고 고열에 시달렸을때는,
살라딘은 그의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였으며
살라딘은 열을 내리기위해 리처드에게
눈으로 채운 신선한 과일을을 선물로 보냈고, 살라딘의 이름이 먼 유럽에 까지 전해지게된 중요한 일화다.
살라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였다.


아수프 전투(Battle of Arsuf)

1191년 9월 7일 살라딘의 군대는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맞닥뜨려 아수프 전투(Battle of Arsuf)를 벌였다.
결국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 하에 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청렴한 지도자였다 이빕트의 지도자가 되면서 얻게된 왕궁의 금은보화중 자신이 착복한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아랍의 역사학자들은 기술하고 있다 승리후 적의 막사에서 나온 풍부한 전리품들을 병사들에게만 나누어 주었을뿐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쓰지않았다고 한다 살라딘은 대부분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살라딘은 1193년 3월 4일, 55세를 일기로 다마스커스에서 눈을 감았는데,
전사로서 자신이 들고 다니던 검과 함께 다마스쿠스 요새안의 정자에 매장되었다 그가 죽었을때 금고안에는 티루스 디나르 한잎과

은화 47디나르 밖에 없었었는데 그의 재산이 장례식을 치르기에도 부족한 정도라서 보고 놀랐다고 한다.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었기에 어떤 종류의 사유재산도 남기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군중들은 거리로 나와서
대성 통곡을 하면서 진심으로 애도했다


백성들의 진정한 애도속에 죽어간 중동의 왕으로 자리매김하고있다 백성의 보호자로서 공정하며 인자한 군주였고
역사의흐름에 떠밀려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누구보다도 평화로운 세상을 간절히 원했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문명간의 충돌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와 관용에 바탕을 둔 상생의 정신을 가르쳐준 위대한 이슬람 지도자다


현재 그의 무덤은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 복서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을 기증하였지만
살라딘의 시신은 아직도 석관 옆 목재로 만든 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고 하며. 이곳은 현재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간다.


기독교도들과의 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은 유럽에 관대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14세기경 살라딘을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지어져 널리 알려졌다.
단테(Dante) 또한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묘사한 바 있으며,
월터 스코트(Walter Scott)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저작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살라딘은 특히 리처드 1세의 존경을 샀는데, 리처드 1세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으로 인정하면서,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였다.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많은 선물을 교환하며 지냈지만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살라딘의 자비심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일화중에서 한가지를 더 소개하면,1191년 4월에,
프랑크족 여인의 3달 된 아기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리자 프랑크인들은 이 여인에게 살라딘에게 자비를 구할 것을 권하였고,
사연을 전해들은 살라딘은 사재를 모아 아기를 사서 여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살라딘에 의하여 건축된 구조물들이 일부 현재까지 남아있다. 1175년부터 1183년까지 카이로에 쌓은 성채가 그러하며,
시리아와 이집트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구조물들이 남아있다.
특히 그가 산 정상에 구축한 콸랏 알 긴디(Qalaat Al-Gindi) 요새는 상단의 통행로를 잘 관측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재로 만들어진 큰 방들과 상점, 수도시설이 잘되어 있다.


콸랏 알 긴디(Qalaat Al-Gindi) 요새
나 이병철은 모태신앙을 가진 가톨릭 신자고 세례명은 베네딕도다 살라딘에 대한 포스코 신문기사를 읽고
역사속의 위인 살라딘에 대해 알아보았고 이글을 쓰면서 살라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되었으며 이슬람의 정신세계도 새롭게 알게되었다
"한손엔 코란, 한손엔 검" 이슬람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문구다 이탈리아 스콜라 학파의 토마스아퀴나스가 언급한 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활동시점은 13세기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패배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슬람 세력은 지하드(성전)로 맞섰다. 단순한 영토전쟁이 아닌 종교와 문명간 갈등과 반목을 동반한것이 바로 십자군전쟁이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말까지 200여년간 벌어진 십자군 원정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는 수백만이 넘는다 심각한 것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유럽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세계간의
반감과 증오가 심화, 축적된것이다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일반인들의 뇌리에 적지않게 전해지고 있다
미국 주도의 아프간 및 이라크 전쟁과 점령을 바라보는 무슬림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떠올린다


 


둔덕 위에 우뚝 솟은 성채는 알레포의 랜드마크다. 알레포는 그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당시 무슬림 세력의 권력 기지였다.
해발 150m의 천연 둔덕에 성벽을 쌓고 주변에 깊이 20m, 넓이 30m의 깊은 해자까지 판 전형적인 요새다.
계단 형식으로 된 다리를 건너 성 안으로 들어서면 광대하게 펼쳐지는 유적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아유비드 궁전의 왕의침실과 목욕탕, 이브라힘 사원, 신학교, 목욕탕, 창고터 등을 히 둘러볼수있다.
성채를 나오면 입구 건너편의 마드라사 술타니야에는 살라딘의 아들 가하지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대치한 중동은 아직 전쟁상태와 같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들은 알고있는것일까
살라딘은 전쟁포로를 끌어안은 포용,백성과 함께한 청렴한 지배자 진정한 영웅이다
살라딘은 이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정복자로 불리고 있다
이세상의 지도자층 인간들에게 살라딘의 정신세계를 본받고 평화로운 세상이되도록 노력해주길 바라며

 


존경하옵는 살라딘이시여 저에게도 당신의 그 용맹함과 그 아름다운 정신을 주소서 2010년06월27일 이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