ぼくの春夏秋冬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실사구시지학

臥龍 李秉喆불잉걸眞劍 2022. 9. 19. 01:21

다산 정약용 1762 ~ 1836)에 대한 탐구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이다. 18세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발전시킨 선진적인 사상가.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했다.

다산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이었던 매형 이승훈(李承薰)과 친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실학은 실사구시지학

(實事求是之學)의 줄임말로써,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이다.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해서 당시의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음모로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이때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학문 체계를 완성했다.

                                                                          후기의 사회개혁론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사회 개혁을 실천할 수 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周禮)〉 등 '육경사서

'(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다산학). 

              〈경세유표(經世遺表)〉는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하여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낡은 제도를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경세유표〉의 구성은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목민심서 (牧民心書)〉는 "옛 이론을 찾아내어 쓸 만한 것을 찾아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제도개혁에 있어서 〈경세유표〉가 전국적 범위에서 국왕·국가가 집행할 것을 모색한 데 비해 〈목민심서〉는 군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흠흠신서〉는 〈목민심서〉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이 일표이서는 저술동기와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1817~22년에       기초, 완성되어 후기 개혁론의 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표이서의 개혁론은

경학사상체계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체계화되었다.

다산은 〈주례〉 속에서 하늘이 내리는 왕의 자리는 한 사람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바뀌어 항상 덕이 많은 사람에게 옮겨진다고 말하면서, 덕의 유무는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왕의 근원은 결국 민의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다산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통치질서를 회복하여 치세(治世)의 근본을 확립하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군주의 우월성은 민의에 의해 한계가 규정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경세유표〉의 〈전제(田制)〉에서는 우선 토지국유제하에서 농민의 개별적 점유를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토지국유의 실현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여 차선책으로 정전제에서 동시에 시행되었던 구일세제법(九一稅制法)만이라도 원용하려는 방안을 제기했다. 이는 토지제도의 개혁보다는 국가재정과 밀접한 조세제도의 개혁, 일체의 중간수탈 배제를 목적으로 한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서 점진적이고 과도기적인 개혁방안이라 할 수 있다. 일표이서에서 표방되는 개혁론은 전기에 비해 훨씬 온건한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현실을 크게 고려하면서 실현 가능한 점진적인 방안, 단계론적 시행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발전 제시

이 단계에서 다산은 평등한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상업의 경우 농업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며 해외 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다(이용후생학파). 이를 위해 동전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금화·은화와 같은 고액화폐의 발행으로 원격지간 교역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즉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중소상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수공업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강조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지방 차원에서 민간 직물업에 관련된 기술도입을 역설했고 〈경세유표〉에서는 토목공사기술 등을      국가 차원의 제도개혁을 통해 적극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중앙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즉 기술도입의 주체인 국가기구가 강력하게 민간산업을 보호·통제하고 기간산업을 관장함으로써 대상인의 횡포에서 중소수공업자를    보호하려 했다. 국영광산론 역시 천연자원에 대한 특권층의 자의적 이용을 막아 국가 통제하에 두며 이익을 공전(公田)     매입에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소농민의 이익이 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밖에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화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를 제안했다 . 이는 18세기말과 19세기초 유통경제의 발전과정을 염두에 둔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주자학과의 관계

다산이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

하여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보고 있는데 비해, 다산은 자연과 인간 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다산은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히늘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하늘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  (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다산이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보고 있는데 비해, 다산은 자연과 인간 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다산은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히늘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하늘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며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자연과학과 실용 기술에 미친 영향

다산은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 지리·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6) (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7) (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그는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수원성의 축조시 거중기·고륜(鼓輪)·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의학·백공(百工)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식수(植樹)·목축·수렵·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정책론을 제시했다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지방 정치의 부패와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자신의 사상을 완성한다. 무엇보다 그는 봉건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회 개혁안을 내놓았다. 정약용이 저술한 일종의 행정지침서인 《목민심서》는 그의 저술을 정리한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여 발전시켰고, 민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작품을 남겼다.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했다. 주요 저서로“목민심서   (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이 있다. 그리고‘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정약용이 유배 생활 동안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아 쓴 61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에 대한 안부와 아들에게 주는 교훈 등 당대 최고의 실학자이자 따뜻한 아버지로서의 다양한 면모들이 각각의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논리적 설득적 내용 구성을 바탕  으로  모범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해 온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실학자 특유의 실용적 가치관도 잘 담겨져  있다. 특히 아들들에게 물려줄 정신적 유산으로 근(勤)과 검(儉) 이라는 덕목을 실천하며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편지다

근의 의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실천해야하는것,  검의  의미는 의복과 음식을 예로 들어 검의 실천과정을 제시함

근검을 추구하는 것 : 값싼 옷감으로 된 옷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며 입을 속이는 것 (실제로 득을 얻기 위함이다)

                                                 정약용 선생님의 묘는,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