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3대장군님들 을지문덕장군님 이순신장군 이방실장군
함안 이가의 시조 이상(李尙)이시다
지금으로부터 약 800年 程度 歷史를 거슬러 올라간 시점(時點)이다.
800年 家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집안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위대하신 선조님 경기도 가평에 있는 咸安氏이방실(李芳實) 장군 이 방실 장군은 고려시대에 판도판서를 지낸 이원의 아들로서 고려 공민왕때의 유명한 구국장군으로 함안 이씨의 중시조이다
나는 21대손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52호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81 이 방실(李芳實) 장군은,
충렬왕 24년(1298)∼공민왕 11년(1362)],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함안(咸安, 파산),
조부는 함안이씨 시조인 광록대부 파산군 이상(李尙), 고려시대에 판도판서를 지낸 이원의 아들로서
배위는 진양부인 진주강씨와 정부인 영산신씨이다.
고려 공민왕때의 유명한 구국장군으로 함안 이씨의 중시조이다.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지금의 경남 함안군 여항면 내동에서 투우봉의 정기를 이어 받아 태어났으며
고려 말엽의 외침에 의한존망의 위기를 수차에 걸쳐 구한 맹장이다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목왕을 따라 원나라에서 호종한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이 되셨고
,곧 호군이 되셨으며, 전(田) 100결(結)도 하사받으셨다
공민왕 3년(1354) 대호군이 되어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에서
민란을 일으킨 다루가치(達魯花赤)노연상(魯連祥)부자를 쳐서 진압하였다.
1359년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 등의 홍건적이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의주를 함락하고,
정주·인주 등을 함락한 뒤 인주에서 웅거하자 안우(安祐)·이음(李蔭)·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철주에서 이를 격퇴하였다.
이듬해 상장군이 되어 다시 철화에서 적을 격퇴하였고, 뒤이어 상만호가 되어 함종에 들어온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고선주에서 접전 끝에 의주 쪽으로 퇴각시켰다. 홍건적 격퇴의 공으로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에 올랐다. 뒤에 홍건적이 배 70척으로 서해도에 침입하자 이를 풍주에서 물리쳐
그 공으로 공민왕이 친히 차고 있던 옥대(玉帶, 옥띠)와 옥영(玉纓, 옥갓끈)을 하사받았다.
이때 공주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어찌 지보(至寶)를 사랑하지 않고 가볍게 남에게 주시나이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우리 종사(宗社)가 폐허가 되지 않게 함은 모두 다 방실의 공(功)이다.
내가 비록 살을 베어 주더라도 오히려 능히 보답하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이 물건이 어찌 아까우리요" 라고 말하였다.
왕이 말씀하신 사실로 보아 우리 민족을 구한 충렬공 이 방실 장군의 업적은 위대한 맹장임을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1361년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의 홍건적이 20여만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 등지에 쳐들어 와서 공민왕은 복주(福州 : 지금의 안동)로 피난하게 되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1362년 총병관 정세운(鄭世雲)·김득배·안우·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중서시랑평장사(정2품)에 올랐으나 개선 길에 이방실장군의 공을 시기한
친원파였던 흥왕사의 변을 일으킨 김용(金鏞)의 간계로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등
공을 세운 장군들과 함께 피살(被殺)되었다.
묘소에는 1978년 철학박사 이을호(李乙浩)가 비문을 짓고, 서흥후인 김창동(金昌東)이
글씨를 써서 건립한 묘비가 있고, 근래에 호석·무인석들이 조선시대 사대부의 묘에 쓰던 형식을 본떠 세워져 있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에는 고려 오백년 역사를 지킨 4성군과16공신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고려 태조(왕건)를 비롯하여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와 고려조 국가에 큰 공을 세운 16분의 공신[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충(趙沖),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이방실(李芳實)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가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芳實할아버지는 將軍이시며 공민왕(恭愍王)9年(1360) 3月에는 추성협보공신이 되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任命(임명)되셨다. 추밀원(樞密院)은
國王의 命令이나 결재를 중개하고 (宮中)의 경비를 맡아보던 기관이다.
임금의 비서실과 경호실(警護室)을 합친 機關이 추밀원이다. 방실(芳實)할아버지는 一線에서 전투(戰鬪)를 지휘하는
將軍(장군)이심과동시에, 나라의 중추부(中樞部)에 계셨던 분이시다.
아무튼 방실((芳實)할아버지는 여러 많은 공(功)으로 벼슬은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 금자광녹대부행
중서평장정사 상장군(上將軍) 원사(元帥)이시다.
지금의 육군참모총장과 대통령비서실장을 겸임하신 것이다
고려시대 거의 대부분의 국토가 홍건적에게 빼앗겨 나라마저 잃을 시기에 외세(外勢)의 도움없이
이를 수복구국(收復救國)하였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양왕때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이나 조선시대 선조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평정(平定)한 이 순신(李舜臣)장군의 공(功)과 더불어
우리 민족사(民族史)에 길이 빛날 것이다.
( 나는 함안이가 27대손이다. 위대하신 나의 선조님
咸安氏 忠烈公 이방실(李芳實)神道碑(신도비)祠宇(사우)塚墓(총묘)장군 묘소-
경기도 기념물 제52호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81에 있고 충렬공 이방실 장군의 기마동상은
경남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 함안공설운동장 앞 함주공원에 있다 함안이가는 문무를 겸비한 가문임을 알수있다
후면
이방실장군님묘정측면 묘비
이방실장군님 신도비
고려시대 4성군, 16공신위패가 모셔진 숭의전
이방실장군님기마상
저는 함안이씨 이방실장군님의 27대손입니다
함안이씨 종친회의 글 전해지는 일화
.
이방실 장군은 화장실에서 변을 보고 있을때 자객이 거적떼기 위로
화살 수십발을 쐈습니다. 이방실장군은 대변을 보시면서 수십발의 화살을 손으로 잡아 챈 무술가 입니다.
고려멸망후 조선왕조 설립 창업기에 특히 조선 태조와 태종시절 일본에 인구유입이 발생합니다.
바로 이때 고려창업 공신 이방실장군 가문등에 대한
숙청이 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때 이 방실장군의 후손들 중에서 고도의 무술을 지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어둠속에서 드러내지 않고 살것을 조건으로 해서 그 당시 일본의 영주들에게 의탁 합니다.
AD 1500년경 일본에 대표되는 두개의 닌자 가문중 하나의 닌자 가문이 갑자기 생겨납니다.
그 가문의 명칭은 이가닌자(李家忍者) 입니다. 순수한 일본가문에는 이가(李家)가 없습니다.
이방실 장군의 후손들입니다
닌자중에서도 최고였던핫토리 야스나가의 6남 : 핫토리 (한조) 마사노리(1542~1592)
이가 출신의 닌자이다. 도쿠가와 16신장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며 이가구미의 두목이다.
한조라는 이름은 이가조의 두목에게 주어지는 중간 이름이다.
저는 이의형(李義亨)의 차남인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조희(兆喜)는 종숙(從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영(翎)의 계자(系子)로
출계(出系)하셨는데 3 아들 중에서 3남인 증사헌부지평
(贈司憲府持平) 태빈(泰彬)의 자손
아들 12세(世) 현(顯)의 증손(曾孫)인 15세(世)
증좌승지(贈左承旨) 후영(後榮)의 장남인
태원(泰元)의 자손이며 27대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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