ぼくの春夏秋冬/思索하며 行動하는 삶

미국 육사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인 영웅 임종덕의 정확한 67년전의 예언

臥龍 李秉喆불잉걸眞劍 2024. 11. 7. 02:19

미국 육사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인 영웅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6.25전쟁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교실에 불을 지르 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질러 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존경하는 임종덕


평소 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가서 교실옆

목조 건물 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후 인민군지프차를 타고온 

민군 요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서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후 양손을 뒤로 묶은 부모님을

마당에 데리고 나왔다 형식적인 재판을 하고 총을 쐈다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 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걷다가
다시 9.28 수복때 미군을
만났다. 그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던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에 들어가서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형, 오빠”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 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시간 후에 아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빔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았다 즉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 몇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임종덕은 고아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 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었
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약값으로 사용했다.
임종덕은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는데, 
어느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 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차 대기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열린 것을 발견하고
가방 하나를 훔쳐
도망갔으나. 멀리 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연행할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이유는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 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해서 사실이라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 하게하라고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었으나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아들이다”하면서 
양자로 입적을 시켰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 를 만났다.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 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냐 ?   
임종덕은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을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듣고  
김장환은 임종덕과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미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먹었다. 음식을 다 먹은 후에 한 친구가 흙 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저것도 가지 고 가서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장환 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적극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후에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 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어떤 미군이  김장환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 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에서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이다.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 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과  화이트 장군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았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 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군종목사가  설교를 해나갔다.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 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는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2011년)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양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설득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본국으로 귀국한다.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하루 100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세워 가며 단어를 외웠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임종덕은
하바드대학교에 입학했다. 1957년 하바드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를 주제로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바드 대학교 학 생잡지에 게제가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임종덕은
<2차 대전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 으로
하바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해서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외교관으로
등용시킬 계획이었지만 
임종덕은 6개월만에 월남전에 지원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어느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짚차로 귀대중 매복 중인 베트공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자기 자신은 포로가 되었다.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라왔다.단 한군데도 부상이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 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의 고위 지휘자를 납치하며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두번째 포로가 되었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만 이었다. 임종덕은 월맹의  최북단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어느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탄창을 몇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 발사하라는 것이다.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칸에 다행히 실탄이 없으면 살고 만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 한다. 

생존 확률은 6대 1인
『러시안룰렛』이란 살인 놀음판이다. 수용소의 고위 관리 자들이 매일 한번씩 했다
임종덕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각자가 택한 것에 돈을 걸어놓고 놀음판을 벌리는 거였다
경호원의 명령으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팀의 군인이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다 넣었다. 임종덕은 탈출의 계획을 세웠다.

다시『러시안룰렛』놀음판에 불려 나가면 지난번과 같은 상황에서 10초안에  그들을 제압하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즉 10초란 것은 1초에 한명씩 사살하고 100미터 정도 떨어진
메콩강에 뛰어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던 순서가
임종덕에게는 한달이 되었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임종덕은 그 한달동안 “10초 탈출”계획을 실행을 위해

운동 연습하는 흉내를 내면서 “10초 탈출”의 연속 훈련을 한달동안 계속했다 한달이 지난 어느날
임종덕이 그들에게 불려 나갔다. 4명이 권총을 차고 서로 2명씩 마주 보고 앉았다. 여자 경호원이
한달 전처럼 
임종덕 옆에 총을 세워놓고 서 있었다. 장교 1명이 자기들끼리 보는 앞에서 권총에
탄환 한 발을 장전하고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받은 임종덕은 한달간 연습한 “10초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는 척 하다가
경계하는 상대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늘이 도왔는지 총 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꼬꾸라지자
임종덕은
상대방이 권총을 꺼내기 전 평소 훈련했던대로  옆에 세워진 총으로  10초만에 그들을 제압하고
강을 향해 뛰었다.
강물로 뛰어든 임종덕은 지난날 특수전 훈련때 배운대로 뛰어든 그 물속 그 위치에서
10분을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이 강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숨을 쉬기 위해  수면에 올라와보니
월맹군들은  강물에 사격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백미터이상 도망간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매콩강 지류이기 때문에 악어와 5미터 이상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 하는 지역이다.

임종덕은 강물을 헤엄쳐 떠내려 갔고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매일 같이 큰 개구리를 잡아 먹었으며 어떤 날은 4미터 이상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임종덕은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고 판단하여 계속해서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날 미군 헬리곱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펄쩍 펄쩍뛰면 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곱터는 베트공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하고
기관총 사격을 했다. 임종덕은  부상없이 밀림 속에 숨었다.
다시 그 헬리곱터 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무조건 백사장으로 다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펄쩍 펄쩍뛰었다. 그순간 미군 헬리곱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했다.

비록 베트공의 군복을 입었지만 저 사람은 월남군인의 패잔병 또는 탈출한 포로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했다. 임종덕은 헬리곱터에 타자마자 실신되어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임종덕은 의식이 회복되자 자신은 미군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즉시 신원을 확인한 미군 수사관은 부모님께 소식을 알려 주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임종덕의 말을 믿지않았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다 아버지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 주었다. 공군 참모총장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 공군대장 이라고 적어 주었다.

밀림속에서 미군 헬리곱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되는날 임종덕은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슨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라고 하였다 임종덕은 존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처음으로 백악관에 가서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대위에서 소령으로 특진하였다 특히 은성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후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와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 이 영화가 바로 디어헌터 (The Deer Hunter)다. ,5년후 닉슨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두번째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미국 중국, 핑퐁 외교로 극비 합의 성공했다  미국과 중국이 적성국가로 외교가 단절된 상태이고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경기만이 중국정부와
국민이 거부반응이 없어서 임종덕비서관은 미국 탁구선수단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로 순방하면서

탁구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임종덕비서관은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를
여러번 만나게 되었다 
주은래가 동생처럼 호의를 베풀면서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났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리겠다고 하자,
임종덕이 한국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직접 가서 알려주라는
허락을 받게되었다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는데 박 대통령이 아주 좋아하면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받아서  결혼을 했다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방문에서 합의 한 대로 1972년 2월 닉선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 공식
성명이 발표되었다 핑퐁외교로 미중외교를 성사시킨 1등공신으로 노벨평화상감으로 선정되었다.

미국 대통령 3대에 걸친 안보비서관으로서 함께 일한 헨리 키신저가 국무장관이되어 미,중 외교에 전념하여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1974년 양아버지가 83세로 서거하고  화이트장군은 재산을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바드대학과 모교인 미 공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임종덕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을 잘 수행했다.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외교도 1979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었다.

미군철수를 고집하는 카터 대통령과 결별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5년사이 완전 철수 하겠다고 할때
주한 미군사령부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이 철군반대를 주장했다. 5월19일 카터대통령은 싱글러브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직 에서 해임시킨후 카터대통령은 임종덕 비서관에게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 한반도 정책에대해 말해보라고 했는데 “ 현재 4만여 미군이 주한하여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재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다”하였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처럼 불이익을 받을줄 알면서도 “전투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바치겠냐”고 했다. 임종덕은 대통령비서관이
걸림돌이 되어 결례가 되므로
자진해서 자리를 옮기겠다고 건의하여 백악관을 떠나 1986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였다.

임종덕은 미국 육군 사관학교의 교과서 주인공이다  6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물배를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가서 허기에 지처  힘없이 누워있던 아이를 6.25 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한 사진이며 ‘우물 가의 소년’ 그 아이가 임종덕이다.
임종덕 소령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 온 과정을
"정글 탈출기"라는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요즘 우크라, 러시아 전쟁에서
북한군 참전과 탄두미사일 발사등 김정은의 도발에
임종덕의 정신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1957년에 쓴  임종덕의 논문은 정확성에 놀랍다
 
마치 예언가 같다  군인으로서 정치학 박사로서  외교가로서  능력을 발휘하여 이룬 업적과 애국심
그리고 인간미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