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나를 죽이고 규범에 맞춰 살아가라고 한다.
그런 ‘바람직함’에서 벗어나 개별성을 강조하는 철학자가 노자다.
신념에 세상일을 억지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기. 노자의 “무위”다.
‘철학’은 세계를 읽어내는 ‘기술’의 하나다.
다만 가장 높은 차원의 기술이기는 하다.
“기술”이란 말을 들으면 귀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겠다.
“기술” 하면 뭔가 하찮은 재주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대개 철학을 자신의 생활에서 끌어내지 못하고,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창조한 철학을 수입하고 적용하는 데 익숙하다.
철학이란, 구체적인 “기술”을 넘어 고상하거나
고차원적인 무엇으로 오해한다.
철학을 만들어낼 능력을 갖춘 철학자들에게도 철학은 삶을
― 여기서 삶은 세계와 적응 및 관계하는 모든 활동을 통칭한다
― 꾸리는 기술에 불과하다. 철학은 예술이나 수학, 시와 같이
다른 기술보다 더 추상적일 뿐이다.
현장에서 만들어낸 사람들에게 철학은 “기술”이지만,
그 기술을 수입한 사람들에게 철학은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된다.
철학을 기술로 활용하는 사회에서는 세계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철학들이 생산되지만,
철학을 신념 체계로 삼는 일이 익숙한 사회에서는 신념에다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려는 무모한 시도가 거듭된다.
어떤 하나의 철학을 정답처럼 믿고 의지한다면 얼마나 비철학적인가.
한국에서 철학적 태도는 사실 비철학적인 경우가 많다.
철학으로 태어난 무수한 기술 중의 하나를 신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이라도 자신의 위에 올려놓고 믿음의 대상으로 떠받든다면,
이는 오히려 철학을 죽이는 일이다. 우리 땅에서 유가 철학도 그랬고,
도가 철학도 그랬다. 사실 어느 철학이 더 좋으냐는 논쟁은 무용지물이다.
철학이 유동하는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고차원의 전략이라면
차라리 어느 철학이 효율적인가를 따지는 것이 더 낫다.
철학자들의 공론장
유가와 도가 즉 공맹과 노장만을 비교해보자. 부질없는 일이지만,
일상 속에서는 가끔 무엇이 더 나은 철학인가라는 것을 놓고 얘기할 때가 있다.
이미 지나간 생각이란 점에서 둘 다 고리타분하다.
구식의 철학이 다시 생명력을 회복한다면 “현재”의 독자가 불러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력을 부여하거나 회복시키는 것이지, 그것들이 저절로 살아나지 못한다.
주도권은 과거에 있는 철학에 있지 않고, 지금을 사는 우리 혹은 나에게 있다.
어찌 죽은 공자나 죽은 노자가 살아나는가.
우리가 살려내려 비로소 살아난다.
문제는 우리가 과거에 있느냐 현재에 있느냐에 있다.
그런데 현재라는 시점을 공유한다고 다 현재를 살지는 않는다.
누구는 과거를 지키고 있고, 누구는 현재를 살며
어떤 사람은 미래에 가 있기도 하다.
똑같은 시계를 차고 있어도 다른 시간을 산다.
오죽하면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프란시스 베이컨이 여전히
중세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당시 사람들에게 우상에서 벗어날 것을 호소했을까.
현재는 우상들 속에서 애써 벗어나려는 몇 명에게만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재라는 것은 미래의 과거로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가와 도가를 비교하기 전에
우리가 서 있는 현대가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해진다.
근대와 이성
이 세 사람에서 출발해서 현대를 해석한다면 결국 이성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된다.
먼저 칼 마르크스는 근대적 세계관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던 이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성을 가지는 물질의 부산물로만 존재한다고 폭로한다.
매우 분명하고 명증한 이성적 활동들이 사실은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같은
물질적 기반에서 피워낸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프로이트는 다른 각도에서 마르크스와 같은 시대를 연다.
인간의 의식 활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힘은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
인간의 의식 활동은 바로 이성의 활동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나와서 오히려 이성적 활동으로 보였던 것들은
사실 성적인 의미가 강한 무의식의 발현으로 추락한다.
결국 인간의 근본적인 뿌리는 이성이 아니라
성적 욕망을 내용으로 하는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그의 저작 <니체와 철학>에서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
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니체가 바로 현대인 것이다.
니체가 왜 현대인가? 그는 근대 이성을 계산적 이성이라고 비판한다.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우주의 본질이다.
이성은 정신으로 존재하고 의지는 육체로 존재한다.
근대가 이성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비이성, 즉 ‘육체성’의 시대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적 조건도,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도,
니체의 의지도 모두 육체성이다. 육체성은 구체성이다.
인간 존재의 근거가 이성 대신에 욕망으로 밝혀지면서 우리의 현대는 시작된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하여 공통의 비율과 공통의 계산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집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추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이해하면서
인간에게는 점점 물질(육체)이 더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욕망은 집단보다는 개별자에게서 더 분명히 확인되는 내용이다.
육체성을 통해서 인간은 “각자”가 된다.
그래서 세계는 이제 집단성이 아니라 개별성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할 것이다.
현대의 방향은 집중보다는 분산으로, 소품종 대량 생산보다는
다품종 소량 생산의 방향으로, 중앙집권보다는 지방 분권으로,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으로, 동일상의 통일보다는 차이성의 공존으로,
추상적 이상보다는 구체적 삶으로,
체계적 이념보다는 개방적 소통으로 나아갈 것이다.
공자가 인간을 “인”(仁)이라고 하는 본질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면서
그의 철학 체계는 이미 근대성을 대표로 보여줄 준비를 마쳤다.
공자에게서 본질로서의 “인”은 잘 보존되고 키워져할 대상이다.
“인”이 확장된 최종적인 단계를 그는 “예”(禮)라고 말한다.
근대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보편적인 이념이다.
그래서 그는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듣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말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의 철학을 한마디로 개괄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한 주자의 말은 매우 정확해진다.
여기서 “기”(己)는 개별적이고 경험적이며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일상적인 자아다.
“예”(禮)는 보편적이며 집단적이고 이념적인 기준이자 체계이다.
그래서 공자의 철학에서는 일상을 영위하는 경험적이고
개별적인 자아는 부단한 학습의 과정을 거쳐 보
편적인 이념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어야 성숙이 완료된다.
여기서는 “나”보다는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다.
노자는 이와 다르다. 보편적인 이념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선”으로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이상”(理想)의 지위를 차지하는 한 “기준”으로 행사된다.
기준으로 작용하면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기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분과 배제 그리고 억압의 기능은 폭력을 잉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준으로 행사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의 단계를
최대한 약화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것을 그는 “거피취차”(去彼取此)라고 표현한다.
즉 “예”처럼 저 멀리 걸려 있는 이념을 버리고,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구체적 “나”(己)의 일상을 중시하라는 말이다.
“극기복례”와는 정반대이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우리”보다는 “나”에게 있게 된다.
보편적 이념의 지배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성에 의존하자는 것이다.
소를 탄 노자
공자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바람직한 것을 행하려 하면서 사셨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것을 행하며 살려고 노력하셨습니까?
당신은 좋은 것을 하려고 애쓰셨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노력하셨습니까?
당신은 해야 하는 것을 하면서 사셨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셨습니까?
” 바람직함, 해야 함, 좋음을 수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다.
노자는 각자 바라는 것,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하는 개별자들이 자율성을 이루어 형성하는
사회나 조직이 강하고 효율적이라고 본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노자의 사상이 현대와 만나는 장면을 쉽게 그릴 수 있다.
즉 개별적 주체들의 생명력(욕망)을 자발적으로 발휘한 상태에서
자율적 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를 한다.
“우리”로 “나”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참여해서 “우리”를 형성한다.
이렇게 하여 개별적인 “나”들은 존재론적인 책임감과
무한한 자부심으로 무장하여 세계의 주인 혹은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등장한다.
보편적인 이념이나 신념의 수행자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자로서 세계와 만나야 한다. +
자신에게 이미 있는 이념이나 신념에 변화하는 세계를 우겨넣으려 하지 말자.
자신감을 갖고, 세상의 일을 그대로를 읽고 반응하는 태도를 갖추자.
이렇게 되면 우리는 철학을 믿음 체계로서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맞추는 “기술”로 휘두르는 주체가 된다.
그리 하면, 세계를 이념이나 신념 같이 정해진 잣대로 보지 않고,
매우 자유로운 상태에서 보이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유위”(有爲)하지 않고 “무위”(無爲)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KB레인보우 인문학에서 펀글 을 편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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