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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이발사 朴秀雄씨가 본 「인간 박정희 대통령 朴正熙大統領

臥龍 李秉喆불잉걸眞劍 2013. 8. 12. 22:18

는 박정희대통령을   정신적인 기둥으로 생각하며

그분의 추진력 결정력 리더십을 미래지향적인 긍정심으로 살고있습니다

그분을  잡학지식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더불어 생각하고 싶습니다

동영상에서는 육영수여사님의 육성음성을 들을수있습니다 

박근혜대통령 음성을 듣는것같습니다

동영상 아래에는 평소에도 검소하시고 소박하셨던 인간 박정희

그분을 가까이서 본 꾸밈없는 에피소드 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국모이신 육영수 여사님과 박정희 대통령  너무나 인간적이셨는데 

비극이되어버린  2분의 삶에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네딕토  이병철   

 

 청와대 이발사 朴秀雄씨가 본 「인간 朴正熙」(2편)

 ―朴正熙 대통령의 머리 생김새가 이상한 곳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朴대통령의 머리는 정확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고

이마도 그렇게 잘생기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시다시피 朴대통령의 귀가 특히 잘 생기셨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에서 보면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는데

양쪽 귀의 모양이 똑같았죠. 보통사람들은 양쪽 귀의 모양이 똑같은 경우가 드물죠.

그리고 귀 윗부분의 머리를 자를 때에도 가위가 귀에 닿지 않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난 부분과 귀의 구분이 뚜렷했습니다』

 

―朴대통령께서 이발관을 찾으실 때 정장 차림으로 옵니까?

 

『아닙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하얀 러닝 셔츠 차림에다

허리띠를 맨 바지의 윗부분을 한 번 아래로 접고 오십니다.

바지의 허리 부분이 헐렁할 때

허리띠를 맨 부분을 한 번 접으면 어느 정도 맞지 않습니까?

 朴대통령의 러닝 셔츠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여러번 봤습니다.

대통령이 구멍 난 러닝 셔츠를 입고 계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는 갑작스럽게 朴씨로부터 逆질문을 받는 바람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그냥 계속하시죠」라고 넘겼다)

 

허리띠도 얼마나 오래 사용하셨던지 구멍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는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어르신, 이제 허리띠를 좀 바꾸시지요」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朴대통령께서 「이 사람아,

이것도 아주 편. 몇 년은 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라며 웃으시더군요』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아

 

―朴正熙 대통령은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상관이었습니까?

 『朴대통령은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부속실로 하여금 이발하러 가겠다는 연락을 하도록 한 뒤

5분 정도만 늦어질 것 같아도 직접 이발관에 오셔서

「朴군, 지금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래이」

하시면서 양해를 구하십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은 뒤 40여 분 만에 이발을 했는데,

 이때에도 朴대통령께서 중간에 이발관으로 오셔서 「미안해서 우짜노. 朴군,

 일 마치고 바로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고 하시더군요. 도리어 제가 미안해

어르신 저는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생각하시지 말고 충분히 집무 보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자 「그래 고맙대이」라며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그리고 원래 나이가 들면 방귀나 트림이 본인도 모르게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朴대통령을 모시면서 그분이 방귀나 트림을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의 이발을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었습니까?

 

『京釜고속도로가 개통된 직후인 1970년 7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이발관에 카세트를 한 대 구입했었습니다. 평소 朴대통령은 가수 남인수,

백년설, 이난영씨 등의 노래를 즐겨 들으셨습니다.

 

그날 대통령께서 이발관에 오셨을 때 제가 남인수의 노래를 틀었습니다.

이발을 하던 중 남인수가 부른 「경부선 열차」라는 제목의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이 노래 가사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기 위해서는 삼랑진과 대구, 대전 등을 거쳐야 하는데

이러다 보니 며칠이 걸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朴대통령께서 이 노래를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만 저에게 「朴군, 이제 고속버스 타면 다섯 시간이면 부산에서 서울로 오고 하루에도 서울과 부산을 왔다가 갈 수 있는데 이 노래를 들으니 한 달도 더 걸리겠네」라고 농담을 하시며 웃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당시 또 朴대통령께서 「황성옛터」라는 노래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하루는 제가 이 노래의 가사를 적어서 대통령께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朴대통령께서 가사를 보시더니 「朴군, 황성옛터의 「황」자가 틀렸네.

이 때는 임금 皇(황)이 아니라 황폐하다는 荒(황)을 써야 맞지. 말이 나왔으니

자네가 한 번 불러 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물론 저는 노래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통령의 청을 받들지는 못했습니다

 

朴씨는 이 말을 하면서 두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朴正熙 대통령의 전용 이발사는 계속 朴대통령과의 기억을 되살려 나갔다.

 

1973년 겨울 어느날 오전으로 기억됩니다. 부속실에서

 朴대통령께서 본관에서 이발을 하시면 좋겠다고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 가끔 이발관이 아닌 본관 집무실 옆방에서

드라이 등 간단한 머리 손질은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제가 여직원과 함께 가운을 입고 본관으로 올라갔죠. 朴대통령께서 저희들을 보시자

「朴군,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꼭 얇은 가운을 입어야 하나?

격식 따지지 말고 얼른 가서 두툼한 스웨터 같은 옷을 입고 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가운만을 입고 여직원에게는 가운 위에 겨울 스웨터를 입게 하고는

다시 본관으로 올라갔죠. 대통령께서 겨울 스웨터를 차려입은 여직원을 보시더니만

「그래, 이렇게 입으니 얼마나 좋아. 이제 안 춥재」하시며 여직원의 어깨를 두드리시고

 이 직원의 어깨에 묻어 있던 머리카락을 털어내 주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朴대통령을 보면 찬바람이 분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朴대통령만큼 인정이 넘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朴씨는 1973년 4월 朴대통령을 모시고 청와대 全직원들이

안양 근처로 모내기 지원을 나갔을 때의 기억도 소개해 주었다.

 

『술은 역시 막걸리가 최고야!』/『이 애가 맏상주인데 이발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날 朴대통령은 오전에 모내기를 한 뒤 점심시간에 막걸리를 여러 잔 마시시고는

직원들보다 먼저 청와대로 돌아가 자신을 찾았다고 한다.

서둘러 청와대로 돌아온 자신을 보고 朴대통령은

『朴군, 막걸리 한 잔 했나? 술이 참 맛있지.

역시 논바닥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먹는 막걸리가 최고야』라고 하더라는 것.

 

朴씨는 朴正熙 대통령이 얼마나 주위 사람들에게 다정다감한 분인가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한 가지 얘기를 더 들려 주었다.

면도사로 근무하던 박순옥씨에 관한 얘기였다.

 

1974년 봄 면도사로 근무하던 박순옥 씨가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이 보고를 들은

朴대통령이 어느 날 본관으로 자신과 박순옥씨를 부르더라는 것.

둘이서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본관으로 올라가자 朴대통령이

『朴군, 순옥이가 곧 시집을 간다고 하니 우리 오늘 사진이나 같이 찍자』고 하더라는 것.

 

朴대통령이 그러면서 사진기를 서랍에서 끄집어 내 이를 朴씨에게 주고 박순옥씨의 어깨를 감싼 채 햇볕이 잘 드는 창가로 가 포즈를 취했다. 朴대통령도 사진기를 달라고 해

 朴씨와 박순옥씨에게 『창가로 다시 가 포즈를 취해.

이번에는 내가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줄게』라고 하시며 사진을 찍어 주었다고 한다.

 

집무실에서 사진을 찍으니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사진이 흐리게 나올 것을 염려한

 朴대통령은 『이왕이면 앞마당 잔디밭에서 정식으로 사진을 찍자』며

두 사람을 잔디밭으로 데려 갔고 서로 두 명씩 짝을 이뤄 사진을 찍었다

. 朴대통령은 세 명이서 같이 사진을 찍자며 부속실 직원을

앞마당으로 나오게 해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는 것.

 

며칠 후 朴대통령이 불러 박순옥씨와 함께 본관 집무실로 가니

대통령이 창틀에 사진을 펴놓고 『이리 와 봐. 지난번 사진이 아주 잘 나왔어.

순옥아, 네가 시집을 가는데 내가 너에게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사진이라도 추억으로 가지고 가라』며 사진을 순옥씨에게 건네 주었다고 한다.

 朴씨에게도 물론 사진을 건네 주었지만

자신은 그후 이사를 다니면서 이 사진을 잃어버렸다고 애통해 했다.

 

이때 朴대통령은 『사진은 너거들에게 주지만 필름은 내가 갖는대이』

하시면서 웃더라는 것이다. 필름은

아마 보안상 외부에 유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게 朴씨의 설명이다.

 

『이 애가 맏상주인데 이발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陸英修 여사가 1974년 8월15일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날도

朴正熙 대통령이 이발을 했습니까?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날 朴대통령의 머리를 만져 드리는 도중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대통령의 머리를 빗겨 드릴 빗이 바닥에 떨어져 두 동강이가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제가 사용하던 빗은 평소 바닥에 떨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괜한 말씀을 드려 대통령의 심기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냥 부러진 빗을 발로 의자 밑으로 밀어넣고 계속 머리를 만져 드렸습니다.

 

그날도 머리를 자르지는 않고 다만 물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빗으로 가지런히 정리만 해드렸습니다. 陸여사께서 文世光의 총탄에 맞으신

그날 저녁 저는 사건현장인 국립극장으로 가 평소 알고 지내던

이 극장 공연계장 이재문씨를 만났습니다. 李계장의 안내로 극장 안에 들어가 보니

방청석 앞쪽에 앉아 있다가 경호원의 응사에 맞아

숨진 학생이 흘린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李계장이 저에게 묘한 꿈 얘기를 하더군요.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꿈을 꾸었는데

陸여사께서 괴한의 총에 맞는 꿈이었다는 것입니다』

李계장은 자신의 꿈이 이렇게 정확하게 들어맞을 줄 알았으면

국립극장 간부들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했을 것이라며 몹시 안타까워하더라는 것이다.

 

―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직후 朴正熙 대통령은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朴대통령께서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志晩군과 槿惠(근혜)ㆍ槿英(근영)씨 등

자녀들을 데리고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가슴이 너무나 아팠던 것은 국민장으로 치러진 陸여사의 장례식 당일(1974년 8월19일)

아침 朴대통령의 머리를 만져 드리는데 눈물을 참지 못해 펑펑 울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두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 앞에 있는 거울을 보니까

 朴대통령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朴대통령께서 志晩군을 부르시더군요.

당시 중학생이던 志晩군이 올라오니까 대통령께서 저를 보고

「임자, 오늘이 이 애 애미의 출상이 아닌가? 이 애가 맏상주인데

이발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잘 좀 해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시더니 朴대통령께서 志晩군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

어릴 때는 예쁘기만 하더니 크고 나니 (대하기가) 어렵구나」라고 하시면서

이발관을 나서셨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朴씨는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고 눈물을 애써 참으려는 듯

청와대가 있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통령 그만 두고 신당동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뒤 朴正熙 대통령은 외로움을 느끼시지는 않았습니까?

 

평소에도 말씀이 없으셨지만 陸여사께서 돌아가신 뒤 더욱 말씀이 없으시고
갑자기 많이 늙으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朴대통령께서는 1976년부터
청와대 본관 앞 구석진 잔디밭에 펜스를 만들어 깃털이 금빛색을 띠는
닭의 일종인 金鷄(금계)를 키우셨습니다.
아마 외로운 마음에 금계를 키우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루는 이발이 끝나자 대통령께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무시고는 잔디밭 쪽을 바라보시다

참새 수십 마리가 날아와 펜스 주위를 맴돌다 이 중 몇 마리가

펜스 안에 넣어둔 먹이를 먹기 위해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자 「

朴군, 저거 보래이. 역시 용기 있는 놈이 맛있는 먹이를 먹는구먼」

하시며 너털웃음을 지으시던 일이 생각납니다.

 

1977년 여름에는 朴대통령께서 이발을 마치신 뒤 돌아가신

陸여사가 생각나셨는지 먼 하늘을 쳐다보시면서

「나도 이제 대통령 그만두고 신당동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집을 처음 살 때 내자(陸여사)와 아이들이 무척이나 좋아했었지.

집안 살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지나치게 많이 마련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라고.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하나하나

키워 나가는 것이 삶의 재미지.

朴군, 자네도 욕심내지 말고 차근차근 살아」 하시면서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朴正熙 대통령께서 金載圭의 총탄에 맞아 돌아가신 날에도 이발을 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날 오전 9시쯤 이발을 하셨습니다.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지는 않았고 물수건으로 머리를 닦아낸 뒤

스킨을 바르고는 빗질만 해드렸습니다.

제가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래, 갔다와서 보자구」하시더군요.

이 한 마디가 제가 이승에서 朴대통령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朴대통령께서 이발관 직원들에게 용돈도 자주 주시곤 하셨는지요.

 『朴대통령께서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저희 직원들에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보통 20만 원 정도였습니다. 10만원 권 수표를 두 장 주실 경우도 있고

 현금으로 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이 돈은 직원들에게 똑 같이 나눠 주고

朴대통령께 보고를 드리면 「그래, 잘했다」고 말씀하셨죠』

 

 全斗煥 추억

 朴씨는 崔圭夏ㆍ全斗煥ㆍ盧泰愚 등 전직 대통령의 이발도 했다고 한다.

崔前 대통령은 청와대 특보시절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을 때 몇 번 이발을 했다는 것. 崔 前 대통령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이발관을 찾았으며

평소에는 자신이 직접 머리를 감고 빗질을 했다고 한다.

 

全 前 대통령과 盧 前 대통령도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시절 가끔 이발을 하기 위해

이발관을 찾았었다고 한다. 全차장보는 이발관을 찾을 때마다 지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술이나 한 잔씩 해라』며 10만 원 정도씩 용돈을 주었다.

 

朴씨는 1980년 9월 全斗煥 장군이 제 11代 대통령에 취임해 청와대로 들어오기 전날

짐을 챙겨 청와대를 나왔다. 朴씨는 이때 청와대를 나온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청와대 근처를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朴正熙 대통령이 없는 청와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朴씨는 인터뷰가 끝날 때쯤

朴正熙 대통령의 왼쪽 손바닥에

임금 「王」 字의 손금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흔히 「임금은 하늘이 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손바닥의 손금만을 볼 때 朴正熙 대통령은
분명 하늘이 이 나라를 이끌고 갈 지도자로 낙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글쓴이 : 김두영(전 청와대 비서관)  혜울 자문위원장 김두영

- 청와대부속실 행정관     - 청와대 사정 · 정무비서관
- 국정자문회의 사무처장  - SOLVAY-KOREA 한국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