ぼくの春夏秋冬/ぼくの春夏秋冬

내어머니의 사랑 과거현재미래와 내 인생에 대한 생각

臥龍 李秉喆불잉걸眞劍 2012. 1. 27. 01:52

내 어머니의 사랑을 돌이켜본 현재의 내생각 Mother of Mine  

                               내 어머니 つきしろてるこ金乙歖  


나는 광양제철소의 히타치설비 전문가로 TCM 라인의

시스템을11년 구축했는데 13년전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해 울산동강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중이었으며  제어머니(츠키시로 태루코 한국명 김을희 )는

부산에서 총알택시를타고 울산에 오셔서 누나와 교대로 간호해주셨다

 

나는 식물인간이었고 고열로인해 의사선생님도

해열제 조치외에는 속수무책이었는데 어머니께서 간호사들 몰래

관장약 2통을 사용한 즉시 변을 보았고 열이 내려가서 뇌수술을 다시 받았고  

 

회복되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사물을 알아볼수 있게 되어

퇴원 3개월전에  모든 심신이 정상이었으나 딱 한가지 왼발 발목이 불편 후유증이 있었다

지금은 걷는 속도가 느리지만  아무런 도움없이 나 혼자  걸으며  활동한다  

왼발 잡이였는데  뛰지는 못한다   

    

내 청춘을 불태웠던 회사의  입사동기들은 지금  이사직급으로 승진해서 

 나이에 맞게사회적으로도 명예가 있으며 사랑하는 자식들과 살고 있지만

나는  혼자 살고 있다  사회복지학적으로 인생의 주기에서  

 40대는 위로는 부모  아래로는 자식을 책임지는인생의 중요한 인간가족 형성기며

사회적인 명예를 갖추는 한남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인데

난 이 시기 자체를 인간 가족으로서 경험해야할  

인간 생활을 못해보았고 깨어진 40대였다는것을 말하고 싶은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이러한 나의 뒷바라지로 고생만 하시다가

2004년12월6일  70세의 삶을 사시고 갑자기 하늘나라에 가셨다

 어머니 모시고  고향 나고야에 갈수도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약속을 못지킨게 내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내 어머니는 名屋市 中區丸町16番池가 고향이며 외할아버지께서는 사업을 하셔서

큰부자이셨고 1944년 12월24일날 식솔들을 데리고 귀국을 해서

외할아버지 고향인 경남 고성군 개천면 청광리에 다시 정착하셨는데

어머니 일기장에 의하면 名屋松元國民學校 4學年3班일때  한국에 와서

고무신이 뭔지 처음 보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1956년12월30일  미군 카츄사 출신의 아버지와 혼인신고를 하셨는데

그때부터 고생의 길을  걷게 되셨다

( 내 아버지는  고지식한  옛날 사고방식의 소유자며)

나는 역사책에 나오는 고려시대  忠烈公 李芳實 將軍의 함안 이가  21대 후손이다 

 

내 어머니는 자식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은 이런것이다”를  몸소 실천하신  위대한 여인이시다

2004년 3월 어머니 모시고 전남화순하와이온천에서  



                       화순 하와이온천에 다녀오다가 광양의 광영성당에서

 

내 어머니는 항상 행동으로 가르쳐주셨고  머리도  천재적이셨는데

 평소에 가족들 주민등록번호 저금통장번호

 시가집과 친정의 고조부 증조부님 기일도 외우고 계셨고 컴퓨터도 잘하셨다

   또한  내가 차를 두고 가면 어머니는  사흘에 한번정도씩 시동을 걸어주셨다  

하늘나라에 가시기전에 林奎 伶규가 보고 싶다고 하셨고

어머니 일기장에는 “영리한 내아들” “사랑하는 내아들 병철아”라고 적어놓으셨다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어머니를 편히 모시지 못한 잘못에 용서를 빌며

 Positive Mental Attitude를 무기로 삼아 이제라도 자랑스런 아들이 되기위해 살고있다

 

내가 백만번 태어나도 나에게 2번의 생명을 주셨던 내 어머니つきしろてるこ金乙歖의

큰아들로 9백9십9만8번 태어날거다 나의 꿈은 아담한 장애자타운을 건설해서

경영하는 것이다  지금은 시각장애인 선교회에서 가끔씩 자원봉사를 한다 

 

그리고 한국자원봉사연합회의 부산일어봉사회 회원으로 사회활동도 하며

 사적으로 기술번역을 하고 있다

 

ぼくのははつきしろてるこ金乙歖ゆるして下さい 愛してます おあいたい

(내 엄마 츠키시로태루코 김을희 용서해주세요 사랑합니다 뵙고 싶습니다)

真剣になつかしいんですね 진정으로  그립습니다

어머니께선 2004년 하늘 나라에 셨기 때문에 사진에 카네이션을 드렸다


ぼく李秉喆には明日が在る善良なお金持ちに成るんだ出來るさ

나 이병철에게는 내일이 있다 선량한 부자가 된다 가능한거야

  

1998년에  도망간 여편네는 2번 마주쳤으나  또 도망을 갔고

1번은 잡아서 아파트에 데려다 놓았더니 또 도망을 쳤는데

도무지 납득할수가 없었다  도둑넘 제발저린다고그 인간만이 알것이다

 

 내 전공분야 대기업에서 인정받은 기술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고속도로휴게소 사고로 뇌수술을 받고 식물인간생활을 했지만

 좌측발이 불편한 장애자가 되었을뿐

모든 심신이 정상인데도  그 인간은 오빠와 짜고 법원 재판때도

나를 정신병자라고 햇었다 웃기는소리였다  

그래서 그인간을 안보는게 내나의 행복이라 생각을 했고  무조건 이혼을 했었다

 그 인간이 남겨놓은 빚과 남겨진 재산이 없어서 

부득이 과장으로 자퇴를 했었다  혼자 살고 있는 지금

내 인생의 터닝포인터를 위해 마음씨 고운 여인을 만나게 되면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만 쉽지 않은것 같다 왜냐하면

요즘 여자들 믿기 어려운 여자가 많기 때문이다

 과거는 필요없으나 히타치산업컴퓨터의

AGC(auto gauge control) 백만분의 1까지 제어하던 ASC(auto shape control)

REC(roll eccentricity control)분야에서는

1998년 자퇴하기전까지는 광양제철소에서 제1인자로 인정받았으며

 

2냉연 tcm 팀이 몇시간동안 해결못한 설비 트러블을

나는 새벽에 연락받고 비상 출근했더니 냉연부장님등 간부님들 총출동해있었는데.

 그 원인을 히타치 PLC의 핵사디버깅 기능을 이용해서  10분 정도에  찾았으며 

 

내가  마스터 PLC의 프로그램을 디버깅해서 다시 확인했고  현장에 내려가는 시간과

팀원이 문제의 스테이션  스페어를 보관하는곳까지 갔다오는 시간을 어림잡아

 20분만에 정상화시키겠다고 큰소리로 보고했고 예방정비가 아닌

예언적인 정비를 해서 트러블 슈팅에 성공했였다

 

TCM팀 전원에게 핵사디버깅을 이용하는방법등 트러블슈팅에 대해 교육도 시킨 사실은

그 당시 근무자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것이며 1TCM의 김점규 반장과

 2 TCM의 허주임을   2008년에 만나고 옛날이야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다 

 

어쨌건 지난 에피소드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때는 선수촌본부에서

일본어 통번역자원봉사를 했고  2007년 사회복지과의  학점이수를 위해

서울디지털대학교 부산디지털대학교등에서 A+학점으로 학사학위를 받아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하여  최근의  내 능력을 검증해 볼수 있었다.

 

또 2008년 부산의 직업훈련원에서 DDC SYSTEM  레이아웃과 제어의 실제에대해

특강도 했고   중소업체의 정신교육 강사생활도 했다 지금도 주제만 있으면

정신교육 관련해서  1 시간 정도는  거뜬히 할수 있고 강의록을 갖고 있다

 

전자공학 교사자격증과 전자산업기사등 자격증 4개는 전공분야를 떠나서

현재하는 일에는 무관하지만  젊었을때 부터

지금도 꽤 쓸만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증명되며

 

직장생활때 회사 사보에 원고를 자주 투고하던 자칭 무명시인이고

철학등 잡학박사라고 생각한다 

2003년 사업실패로 약10억여원 날렸지만 깨끗하게 정리하였고

 

지금도  미래지향적인 패러다임과  현재도 정상인 능가 할수도 있는

정신적인 능력은 있고  매월 고정적이며 안정된 수입으로 재기를 하려고 노력했고 

언젠가 유익하게 사용 하려고 강원도 철원에 땅도 사두었다

 

현재 좌측다리의 발목을 뜻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로  불편할뿐이다  멍청하지 않아도 장애자라는 편견 때문에

한국사회에서는 재혼하는게 어려운것 같아서 안타까운 현실을 실감하고

혼자 살 생각이다   한번 왔다 가는 것이  인생이거늘

 

자식도 무슨 필요가 있으랴 도와주려고 해도 

그 나쁜 인간에게 무슨 엉터리 세뇌교육을 받았는지 만날수가 없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당시 내가 모르는  공공기관 의 빚 독촉 통지서등등

모든 증거물은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나는 36년간 일기를 쓰고있기 때문에 당시 상황들은 모조리 기록되어 있다

 

 どんなに悲しい淚でも乾くときがくる아무리 슬픈눈물이라도 마를날은 온다 

一旦思ぃ込だら命懸けた 일단 결심하면 목숨을 건다

 

ぼく李秉喆は人生の夢と愛を忘れなくけっして立ち止りはしない  

 나 이병철은 인생의 꿈과 사랑을 잊지 않으며 결코 포기치 않는다

新しく燦立する李秉喆は真劍な津波で新しい 人生の 敵な花を咲かせるんたぜ

새로이 찬립한다 이병철은 진실한 쓰나미로새로운 인생의 멋진꽃을 피울거야

 

ぼく李秉喆は人生の良い相手に会って前向きな生を元氣で

必ず ちゃんと楽しく 暮したいです

나 이병철은 인생의 좋은 반려자를 만나서

미래지향적인 생을 활기차게 꼭 착실하게 즐겁게 살고 싶다

 오늘 이글을 쓰게된것은  서핑중에   어머니 사랑에대한  글을 보게 되어서. 

내생각을 갈무리 해본것이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한번 살다가 저세상 가면 그만이다

무념무상으로내 건강챙기며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내 마음것 자유롭게 살다가 

 먼 먼훗날 저 세상으로 떠나면 그뿐이다

그 먼훗날이 오면  지금 하늘나라에 계신

 나의 위대하신 어머니를 만나 이세상에서 못다한 효도를 해야겠다 

사랑하는 인자하신 내엄마다